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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에스더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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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울 Dec 26. 2021

눈 속의 여행자

(10/10)

  귀국 후 주말 내내 침대에 누워있었다. 출근하여 팀장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고용노동부에서 외국인력 담당관을 개방직으로 뽑는다기에 서류를 넣었다고 했다. 팀장이 깜짝 놀라는 표정으로 무슨 애로사항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주민 복지재단에서 주말마다 법률 상담을 해왔는데 불합리한 정책이 많다고 했다. 정부에 들어가서 일할 수 있다면 정책을 개선해 볼 좋은 기회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합격 통지를 받은 것도 아닌데 너무 일찍 팀장에게 얘기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사실 좀 쉬고 싶었다.


  시차 적응이 되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심신이 피로해서인지 졸음이 쏟아졌다. 책상을 정리하고 컴퓨터를 끄려는데 메일이 도착했다. 다음 주에 프까이의 죽음과 관련하여 재단 차원의 기자회견을 할 예정인데 참석할 수 있는지, 영농법인 대표와 근로감독관에게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 확인하는 간사의 메일이었다. 검토 의견은 주말까지 보낼 것이고 기자회견에도 참석하겠다고 했다. 이번 주말부터 봉사 시간을 늘리겠다고 덧붙였다. 컴퓨터를 껐다. 멀리 명동성당과 남산이 보이는 창가로 걸어갔다. 오후에 시작된 눈이 그칠 줄을 모르고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올겨울에는 유난히 눈이 잦다는 생각이었다. 날이 어두워지고 눈 쌓인 도심이 고요했다. 신호등의 붉은빛이 함박눈에 가려 희미했다.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퇴근 시간이라 도로에는 차들이 가득했다. 눈송이가 더 굵어졌다. 을지로 입구를 지나 인사동까지 걸었다. 안국역을 지나 가회동 입구에서 빨간불에 걸렸다. 길 건너 북촌의 한옥마을이 눈에 잠겼다. 빨간 목도리를 두른 어느 여행자가 골목 앞 가로등 근처를 서성이고 있었다. 까무잡잡한 피부는 프까이를 닮았고 가늘고 긴 다리는 에스더를 닮았다. 파란불이 들어왔다. 내 발걸음이 빨라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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