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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얌전한고양이 Aug 20. 2021

슬럼프

그래서 아빠와 산책 한 이야기

슬럼프가 왔나, 그날따라 끊었던 웹툰을 보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그리고 운동이 잘 안 된다. 글도 잘 안 써진다. 의욕이 전혀 없다. 마침 아빠도 원래 하던 공부에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있어서 휴대폰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아빠와 함께 산책하러 나갔다.


우리는 맞은편에서 큰 프랜차이즈 카페가 보이는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 옆에서 한 무리의 청소년들이 몰려왔다. 조잘조잘 떠드는 모습들이 마치 참새 같았다. 하얀 와이셔츠에 남색 하의를 입은 고등학생 무리였다. 그들을 보니 너무 부러웠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나는 충분히 즐기지 못했는데, 그리고 아직 성인이 될 준비가 안 됐는데 어느 순간 20대 중반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아파트 단지 뒤편에 있는 자전거도로에서 걸었다. 자전거도로 양 옆은 풀밭이었다. 비가 온 지 얼마 안 돼서 선선한 바람이 불었는데, 그때마다 촉촉한 흙냄새, 풀냄새가 났다. 그리고 한 밤중이라서 주변은 어두컴컴했다. 하지만 자전거 도로를 따라 옆에 가로등이 줄줄이 놓여 있었다. 그 가로등이 딱 자전거 도로만 비췄는데, 마치 뮤지컬 공연 무대 같았다. 그리고 우리는 무대 위에서 대화를 하며 걸어 다니다가 무대 옆으로 빠지는 단역 1, 단역 2 같았다.


아빠는 평소에 자격증 시험공부를 하거나 집안일, TV 시청, 유튜브 시청 밖에 안 한다. 그래서 새로운 취미를 가져보라고 했다. 그러면 항상 '이 나이 먹으면 그동안 살아온 세월이 있으니 그게 쉽게 안 된다', '탁구, 당구, 볼링 같이 동적인 걸 하고 싶은데 코로나 때문에 못하고 있다', '글쓰기나 책 읽기 같이 정적인 건 맞지 않다'라고 한다. 그냥 무조건 다 안 된다고 한다. 잘 안 되고 재미없어도 하나 붙잡고 잘할 때까지 하다 보면 재미있어진다고 해도, 아빠는 이런 이야기를 불편해한다.


마침 근처 물가에서 황소개구리 울음소리가 났다. 그러자 아빠는 갑자기 대화 주제를 바꿨다. 요즘 황소개구리가 천적이 없어서 생태계 교란종이었는데 외국에서 두꺼비가 들어와서 황소개구리 씨가 마르고 있다는 얘기를 했다. 한 줄로 요약되는 얘기지만 언제나 10줄 이상으로 만든다. 간단한 걸 복잡하게 만들고, 짧은 걸 길게 늘여서 설명하는 게 아빠의 특징이다. 그 뒤로 아빠는 1시간 가까이 백신 접종과 피라맥스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나는 그냥 묵묵히 들어줬다. 아빠는 나보다 더 큰 인생의 슬럼프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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