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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해단 Oct 04. 2023

간암

아빠의 요양생활이 점차 길어졌다. 아빠가 진주에서 할머니와 살게 된 후, 엄마와 내가 자유를 맛보았기 때문이다. 엄마와 나는 밥을 안 챙겨도 됐고, 둘 중 한 명이 일찍 들어와야 하는 의무 또한 사라졌으며, 항상 깨끗한 집을 가지게 되었다. 이기적 일지 모르지만, 그랬다. 참으로 편한 생활이었다.

아빠는 종종 전화해 필요한 물건을 말했고, 나는 택배로 보내주었다. 시골이라 먹기 힘든 음식이나 간식을 종종 보내며 죄책감을 씻어 내렸다. 


아빠는 점점 집으로 돌아오고 싶어 했다. 시골에서의 아빠는 할 일이 전혀 없었다. 할머니 따라 경로당에 가면 막내라고 했다. 함께 대화할 사람이 없어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고. 너무 심심해서 부산의 집으로 돌아오고 싶다고 말이다. 그럴 때마다 엄마와 나는 기겁하며 진주에 있으라고 했다. 아빠의 반복되는 부탁을 거절할 만큼 우리는 자유에 길들여져 있었다. 


어느 날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고 한다. 아빠가 노랗다고. 온몸이 너무 노랗다고 했다. 아마 큰아빠와 할머니, 엄마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빠에게 큰 병이 또 찾아왔다는 것을. 나는 소식을 듣고 바로 아빠를 병원에 보내야 하지 않냐고 했다. 하지만 어른들은 그러지 않았다. 




'노랗다'는 이야기를 까먹고 지낼 무렵, 아빠와 큰아빠가 드디어 큰 병원에 검사를 받으러 간다고 했다. 


응, 그렇구나-

그때도 나는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다. 아빠에게 어떤 일이 닥치게 될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일까, 현실감각이 잠시 사라졌던 걸까.


아빠가 간암에 걸렸다고 했다. 소스라치게 놀라 굳어버렸다. 그럼 항암을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지? 다시 병원에 입원해야 하는 건가 복잡한 머릿속을 뒤로하고 어른들에게 이것저것 미래의 방향을 물어보았지만 반응은 침착할 따름이었다. 항암도, 치료도.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른들은 아빠의 심각함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손 쓸 수 없을 만큼 멀리 왔다는 사실 또한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새벽, 엄마에게 또 전화가 왔다. 


엄마는 나를 깨웠고, 간단한 짐만 싸서 진주로 가야 한다고 했다. 나는 눈도 못 뜬 채 손에 잡히는 이것저것을 모두 가방에 집어넣었다. 안 잡히는 택시를 겨우 잡고, 진주로 향했다. 수원에 사는 언니에게도 전화했다. 당장 내려와야 할 것 같다고.


택시를 타고 진주로 내려가는 길에 점점 정신이 돌아왔다. 점점 상황파악이 됐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뛰었다. 아빠가 곧이라도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계속 생각하고 후회했다. 힘들어도 아빠 부산에 오게 할걸. 좋아하는 음식 사주고 데이트라도 몇 번 더 할걸. 지금 내려가는 길이 마지막 아빠를 보는 길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바랬다. 믿는 신은 없었지만 세상의 모든 신에게 빌었다. 지금 데려가지 말아 달라고, 우리 아빠 아직 너무 젊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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