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직업은 중장비 기사였다. 일을 꾸준히 받기 위해서는 그 세계관의 인맥을 유지해야 했다. 이런 직업의 특성상 아빠는 지인이 많았고, 술자리가 잦았다. 아니, 내가 보기에는 일 때문이 아니어도 친구를 자주 만났고 늘 술을 마셨다. 워낙 흥이 많고 음주가무를 즐기던 사람이라 일 핑계대며 술마시기 딱 좋았을 거다. 집에 있으면 아빠를 찾는 전화는 끊임없이 왔고, 늘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참 의아했다. 병문안 오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분명히 내가 기억하는 아빠는 친구가 많았는데. 내가 아는 아빠 친구들만 해도, 따라간 모임만 해도 몇 개나 되는데 이렇게나 조용할 수가 있나 싶었다. 간간히 엄마에게 전화가 오거나 정말 친했던 한 둘의 방문을 제외하고는 고요함 그 자체였다. 아빠를 찾아온 사람들 중에는 눈물 흘리는 사람이 없었다. 눈물을 둘째 치고, 엄마와 한 두 마디 나누고는 해야 할 일을 처리했다는 듯 서둘러 자리를 뜨기 바빴다. '나는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하는 표정이 읽어졌으며, 그들에게는 아빠를 향한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유독 아빠를 닮았다. 보통 첫째가 아빠를 닮는다는데, 이 집은 둘째가 아빠를 닮았다며 신기하다는 말도 종종 들었다. 그래서인지 나 또한 성인이 된 후,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술자리를 가졌다. 친구를 만나서 술을 안 마시면 뭔가 섭섭하게 느껴졌고, 술이 있어야 비로소 그 허전함이 채워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21살, 아빠가 쓰러진 후 인간관계에 대해서 깊은 생각에 빠졌다. 만나서 술만 마시는 관계는 친구가 아니라는 결론이 섰다. 술이 인간관계의 중심이 되면 안 된다는 뜻이었다. 술 없이는 이어지지 않는, 그런 관계는 술'친구'가 아니라 '술'친구였다는 걸 알았다.
아빠가 퇴원을 하고, 할머니 댁에서 요양을 하러 고향으로 갔다. 연로하신 할머니가 아빠를 챙겨도 얼마나 챙길 수 있겠나. 그때 아빠의 고등학교 친구가 나타났다. 아저씨는 아빠가 진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 달에 한두 번씩 할머니댁으로 왔다. 아빠를 데리고 목욕탕에 가서 몸을 씻겨주고, 최애음식인 짜장면을 사주고는 다시 집까지 데려다줬다.
시골에는 할 것도 없고, 갈 곳도 없고, 경로당을 가도 아빠에게도 어른들인 할머니 할아버지만 가득하다고 재미없다는 아빠의 말 끝에는 늘 그 아저씨가 있었다. 저번 주에는 때가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 이번 주에는 또 다른 곳을 가기로 했다며 마치 무용담을 펼치듯 자랑했다.
아저씨는 자신의 자리에서 아빠의 간병을 도왔다. 그러한 아저씨의 태도에 아빠는 큰 위로를 받았던 것 같다. 많은 친구들이 자신을 떠나 연락조차 하지 않을 때, 먼저 찾아와 기꺼이 시간을 내어주는, 나에게 무슨 상황이 생기더라도 나를 떠나지 않아 주는, 그런 친구가 한 명정도는 있었다는 것에 말이다.
나는 간병이 그저 옷을 갈아입히거나, 밥을 챙기는 행위의 영역이 다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간병의 본질은 아픈 사람의 옆에 있어주는 것. 당신이 아파도 나는 그저 당신 옆에 여전히 남아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심적인 영역도 포함되어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