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삼 형제 중 막내였다. 아빠는 형님들의 말이라면 무조건, 무조건 충성하는 동생이었다. 어릴 적 언니와 싸울 때면 나에게 꼭 들려주셨던 이야기는, 자신은 형님들이 무서워서 '감히' 대들지도 못했다는 거였다.
엄마가 병원에서 출퇴근을 하며 지낸 지 수개월이 지났을 쯔음, 엄마에게도 한계가 찾아왔다. 지칠 대로 지친 엄마에게, 백부님(아빠의 큰 형)께서 손을 내밀어 주셨다. 백부님은 고등학교 선생님이셨다. 교직을 그만두시고, 취미를 즐기시며 행복한 은퇴라이프를 보내시는 걸 sns 프로필 사진으로 보았던 기억이 났다. 그런데 아빠 간병을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어? 아니 그전에, 아빠랑 그 정도로 우애가 깊었나?
나는 아빠가 백부님과 사이가 좋은지 나쁜지, 평소에 연락을 잘하는지 등의 관계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각자의 가정을 이루고 떨어져 지낸 시간이 매우 길었기에, 가깝지 않다고 추측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안락한 일상과 즐거운 취미를 포기하시고 간병을 하러 부산까지 올 정도의 우애는 아닐 거라 감히 판단했다.
내가 알던 아빠가 맞나? 백부님의 등장은 아빠를 순한 양으로 바꿔놓았다. 엄마 말은 죽어도 안 들었지만, 형의 말은 곧바로 잘 따랐다. 엄마와 내가 뭘 시키려하면 꾸물거리면서 사람 속을 뒤집어 놓더니, 백부님의 말씀 한마디엔 엉덩이가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그 차이가 너무 크다 보니 어이없는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아빠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바닥을 뚫고 지하로 기어들어가는 힘없는 말투로 듣는 나마저 축축 처지게 만들더니, 백부님이 오시자 목소리 톤이 얼마나 올라갔는지 모른다. "형님! 형님!" 하는 우렁찬 목소리와, 백부님을 따라 산책하고 운동하러 다니는 활발한 모습에, 백부님이 와주셨다는 사실이 아빠에게 얼마나 큰 행복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빠의 간병을 돕는 백부님을 마주하며,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Q. 언니가 아플 때 너도 그렇게 할 수 있니?
A. 당연하지. 내 모든 걸 멈추고 도와야지.
'참나, 말이 쉽다. 생각이 쉽다.'며 내 대답을 비웃었다. 실제로 내 일상을 포기하고 형제자매의 간병을 한다는 것. 그 생각을 현실로, 행동으로 옮긴다는 것. 과연, 나는 백부님처럼 할 수 있을까.
백부님은 아빠를 외면할 수 있었다. 상황, 거리, 명분이 명확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으셨다. 나는 감히, 백부님의 희생은 엄마의 희생보다 더 큰 결심이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이미 각자 가정을 꾸리고 다른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지금, 다시 형제를 찾아 간병을 한다니. 다녀오라고 해 준 큰엄마와 사촌언니오빠들에게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형제자매는 그저 같은 가정에서 태어남으로써 인연이 시작된다. 내가 선택하지도 않은 사람과 가족이 되어 유년시절을 함께 보내고, 각자의 길을 찾아 헤어진다. 하지만 나의 정체성이 만들어지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알고 같이 성장해 나간 사람이 있다는 것. 내 모든 것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 관계인지. 백부님의 간병은 나에게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에 대한 고마움, 소중함을 일깨워주셨다.
백부님께서 아빠의 간병을 끝까지 마무리하는 걸 본 지금, 앞 선 나의 질문에 한 치의 의심 없이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다.
"당연하지! 내 모든 걸 멈추고 도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