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함 110호 옆 우편물을 펼치며
흑연 (나는 그냥 연필이에요) / 레옹
따뜻한 옷 속에
숨어 있는
연희야
김 작가랑 최 작가랑
분위기 심상찮다
눈치 빠른
두 작가들
따뜻한 겉옷
한 꺼풀씩 벗은
날 선
연필이야, 나는
새까만 금
그어가는 나
너는
무엇을 기다리니
학연이니
같은 학교 나왔다고
지연이니
같은 지역 출신이라고 말하지만
흑연처럼 조용한 나
김 작가랑 최 작가 사이에서
새까만 금
그어가는
나는
연필일 뿐이지
가늘게 깎이며
사라져 가는 마음
그저 선 하나
이어주는 존재일 뿐
하지만
너는
내가 그저
연필이기만 하다고
말하지는 말아 줘
'흑연 (나는 그냥 연필이에요)’을 쓰며
이도우 작가의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를 읽고,
책장에 꽂던중 동명 작가의 [사서함 110호 옆 우편물]책을 발견했어요. 아주 오래전, 사놓고 깜빡(?) 방치했던 책이었던 거죠. 미안한 마음에 얼른 첫 장을 넘기자마자 연필심이 사각이며 깎여 나가는 장면을 만났고, 그 순간 제 안에서도 무언가가 갈려 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조용히 흩날리던 흑연가루는 어쩌면 제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흑연은 늘 침묵합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손을 거쳐
한 줄, 한 줄
선을 이어주고,
그 끝에 마음을 남기곤 하지요.
‘연희’는 제가 흑연에게 부여한 애칭입니다.
‘학연’, ‘지연’에 걸맞은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어요.
세상은 관계를 구분 짓는 말들로 사람을 설명하려 하지만
저는 그 사이에서 조용히 선을 그어가는
흑연이고 싶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그어버리는 금이 아닌,
이어주는 마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저 연필처럼 부드럽게 깎이며
선 하나를 건네는 존재가 되어도 괜찮다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오늘도 흑연은 조용히,
당신의 마음 어딘가에
선 하나를 잇고 싶어 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