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감정의 주인이 되는 자기결정권 연습
여러 겹의 엘리베이터 안에 숨듯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게다가 자기결정권이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다. 그놈의 결정이란 단어에 아내의 결정 장애가 생각났다. 짬뽕인지 짜장인지, 꽃무늬 원피스인지 물방울 치마인지 같은, 옆에서 보기엔 아주 사소한 선택 같아 보이는 것들. 하지만 아내는 그런 사소한 것에도 아주 진지하게 어려움을 겪는다.
이사 오면서 소파의 모양, 색, 기능을 결정하느라 2주 동안 집안은 휑했다. 어디 소파뿐이랴 장롱, 침대, TV 장 등 자리를 채우는 데는 그 후로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나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것들. 편하고 이왕이면 예쁘면 좋겠지만 선택하는데 피곤해지는 것보단 차라리 그냥 대충 아무거나가 편하다.
선택은 결정을 하는 일이고 결정은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다 보니 자신의 결정이 후회나 실패할까 염려되어 머뭇거리게 된다. 한편으로는 크고 작은 일에 이런 주저하는 일은 누구나 겪는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 책은 이런 주제를 삶으로 넓혀 이야기한다. 저자가 말하는 '심리학적 관심으로 본다는 것'이 삶에 어떤 식으로 개입되고 결정에 영향을 주는지 궁금하다.
"저는 제때 밥 먹고 잘 자기만 해도 행복한 사람인데 왜 한국에 있을 때는 이것만 가지고는 행복하지 못했을까요?"라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던 청년이 한 예능 프로에서 했다는 이 말이 약간의 이물감이 목에 걸린 것처럼 느껴졌는데 바로 이어 '내 삶의 결정권은 누구에게 있는가'라는 제목을 보자 결국 마음이 복잡해졌다. 쉽게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고개를 들어야 했다.
굳이 산티아고를 걷지 않아도 내 삶이 고되고 피로하고 재미없다는 것쯤을 모르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런 삶을 정주행 해야 하는 데는 내 삶에는 나만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다 눈앞에 맛있는 게 있거나, 사고 싶은 것들 앞에서 가격표를 만지작거릴 때나, 경비 앞에서 안 가는 여행이 아닌 못 가는 처지는 여지없이 아이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생각을 뒤집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돈이면 애들 치킨이 몇 마리인데…."
부모로 산다는 건 아이들의 인생을 결정해 주는 일은 아니지만 좀 더 많은 선택지를 만들어 주어야 하기에 잠시 아니 그보다는 좀 오래 나를 잊어야 한다. 그래서 '내 삶의 결정권'이라는 대목에서는 어쩔 줄 모르겠다. 나도 이렇게 살고 싶지 않지만 이럴 수밖에 없을 때는 참 우울하다. 단언컨대 나만 그러고 살진 않을 거다.
그리고 "와, 쟤는 진짜 멘탈 갑이다!"라는 말은 비아냥거릴 때 쓰는 정도라 생각했는데 '상황이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흘러가도 자신만의 가치관, 신념, 기준이 있기 때문에 우왕좌왕하지 않고 중심을 잡고 상황을 바라볼 수 있는 것(p58)'이란 설명에 뒤통수 한 대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면서 자기감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대한민국에서 나이 오십쯤 먹은 남자는 오랜 학습의 결과가 있다. 다름 아닌 바로 "사내새끼"라는 말이다. 어릴 때부터 남자는 딱 세 번만 울어야 했고, 대장부가 되는 길을 연마해야 했다. 부엌이라도 들어갈라치면 아주 중요한 것이 떨어진다고 가르침을 받았다. 그것도 두 개나 떨어진다니 안 들어가고 말지.
어쨌거나 넘어져도, 싸워 쌍코피가 터져도 캔디도 아닌데 울지 못했다. 심지어 그 또래가 감당하기 어려운 왕따 같은 일을 겪고 훌쩍거리기만 해도 그놈의' 사내자식 그 정도 가지고'란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땐 감정은 드러내는 것이 감추는 것이라 배웠다. 그래서 저자의 "모든 감정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준다."라는 말이 슬프게 다가왔다. 맞는 표현이겠지?
"무거운 짐을 들어 올리는 것보다 더 힘든 건 그 짐을 어깨에 메고 하루 종일 버티는 일이다." p167
삶에 있어, 더구나 먹고사는 일에 매진해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면 다양한 심리적 어려움을 맞닥뜨린 게 되리라는 것쯤은 안 봐도 비디오일 테지만 그런 감정의 부스러기들을 일일이 스스로 털어낸다는 게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그렇다고 정신 상담을 받는 것도 쉽지 않은 게 현실이고.
한동안 편두통이 너무 심했다. 하루는 고함을 쳐야 할 정도로 통증이 심했다. 식은땀이 흐르는 것처럼 등골이 서늘한 느낌을 동반한 통증에 119를 부를 정도의 고통이었다. 피검사와 CT를 찍고 진찰을 했다. 별다른 소견을 찾을 수 없다고 정신과 상담을 받으라고 했다. 너무 과도한 스트레스로 그럴 수 있다고. 한데 아이러니한 건 나 스스로는 스트레스 없이 풀 거 다 풀고 산다고 생각한다는 거다. 그리고 석 달쯤 지난 지금은 그럭저럭 편두통 없이 산다.
결국 저자의 말처럼 버티는 삶이다.
이 책은 정신건강의인 저자의 셀프 심리 코칭을 통해 자기감을 높일 수 있도록 방법을 제시한다. 정신 분석, 그러니까 자기감정을 직면해서 기록하고 모아진 데이터를 분석해 자신의 감정 변화에 주목할 수 있게 돕는다. 꽤 과학적 절차다. 다시 말하면 데이터를 모으는데 꽤 여러 날 애써야 하는 일이다. 지금 드는 감정은? 대략 난감이다. 왜냐면 내 인내력은 싸구려 치즈다. 쉽게 너무 쉽게 끊긴다. 해보고는 싶지만 할 수 있을지.
이 책 한 권을 다 읽는다면 아주 찐한 상담한 기분이 들 만큼 유용한 책일 것이다. 나는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