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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규 Oct 15. 2024

햇살, 눈물, 그리고 노트북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오늘 전국 1만 4,465개 투표소에서 실시됩니다. 이번 선거는 민선 8기의 광역단체장 및 기초단체장, 광역 및 기초단체 의회의 의원을 뽑는 선거입니다. 또한 국회의원 7명을 뽑는 재보궐 선거도 동시에 치러집니다.’


‘일반 유권자는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공공기관에서 발행한 신분증을 가지고 지정된 투표소에서 투표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19 확진자와 격리자 등은 오늘 저녁 6시 30분부터 7시 30분까지 한 시간 동안 투표할 수 있습니다.’


아침부터 온통 오늘 실시되는 지방선거에 대한 뉴스뿐이다. 늘 사육통 뚜껑에 거꾸로 매달려 있기만 하던 달달이가 오늘은 웬일인지 나무 밑동 모양의 장식품 위에 자리를 잡고 있다.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해 보아도 이틀 전 처남이 전화로 알려준 내용과 관련된 뉴스는 없다.

  

“최 박사가 만든 뇌 오가노이드에 형성된 의식의 실체가 모호한 것으로 최종 결론이 났어요. 매형도 잘 아시다시피 지능과 달리 의식은 주관적인 측면이 강하잖아요. 아무리 코딩 작업과 롤 게임을 하고 의식을 지닌 뇌와 비슷한 전기 에코가 발생했다고 해도 그것이 과연 의식의 행태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는 게 특별조사단이 내린 결론이에요.”


“반대로 생각하면 최 박사의 주장대로 그게 의식일 수도 있다는 말이잖아.”


“그러게 말이에요. 특별조사단이 자세한 내용을 밝히진 않았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오가노이드 지능과는 좀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나 봐요. 그런데 더욱 더 말이 안 되는 건 그 특성이 해킹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나 봐요.”


“그게 무슨 뜻이야? 좀 더 자세히 말해봐.”


“최 박사의 이번 연구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의식이 감지된 시점이잖아요. 한국뇌과학연구원의 해킹 사건 이후 갑자기 의식이 감지되었으니 해킹으로 인해 의식이 발생한 게 아니냐 하는 의심을 샀죠. 그런데 해킹 조직의 인위적인 조작이나 해킹에 의한 자극 등으로는 최 박사의 뇌 오가노이드에 형성된 의식 같은 게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즉, 해킹으로는 만들어질 수 없는 특성, 그리고 기존의 오가노이드 지능과는 분명히 다른 특성을 지녔지만 이게 인간의 의식이라고 결론 내릴 수 없다는 게 특별조사단의 최종 입장이에요.”


의식은 매우 주관적이며 복잡해서 현대 과학으로서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단순한 지능만 지니고 있는 달달이가 자신이 지닌 것을 의식이라고 우겨도 달리 반박할 만한 근거가 없는 셈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오전 10시 기준 전국 유권자 4430만 3449명 중 386만여 명이 참여해 투표율이 8.7퍼센트로 집계되었습니다. 이는 2018년 제7회 지방선거 동시간대 투표율 11.5퍼센트보다 2.8퍼센트포인트 낮은 수치입니다.’


‘지난 27~28일 이틀간 이뤄진 사전투표율은 오후 1시 집계부터 합산해 반영됩니다. 이번 지방선거의 사전투표율은 20.62퍼센트로 전국 단위 선거로는 최고 투표율을 기록했습니다.’


오전 10시 30분인데도, 여전히 최 박사의 뇌 오가노이드 파괴에 대한 뉴스는 찾아볼 수 없다.

 

“최 박사의 뇌 오가노이드 파괴 결정은 국가 안보 차원에서 이루어진 거예요. 정체를 알 수 없는 의식을 그대로 두면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모르잖아요. 그게 인터넷으로 들어가 진화하면 자칫 국가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한 거죠.”


“뇌 오가노이드에 형성된 의식을 파괴한다고? 어떤 방식을 사용하는 거야?”


“정해진 방식이 있는 게 아니라, 과학적으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기로 결정했어요. 1단계는 뇌 오가노이드에 대한 영양 공급을 차단해 의식 관련 기능을 억제하는 방법이에요. 이건 이미 사흘 전부터 시행되고 있어요. 2단계는 신경세포의 신호전달을 방해하는 약물을 사용해 신경세포의 기능을 억제하는 건데, 이 방법은 오늘부터 시행될 거예요. 그리고 마지막 3단계는 뇌의 의식 관련 영역을 물리적으로 파괴하는 거예요. 뇌 오가노이드에 고전압의 전류를 흘려보내 전기적 충격으로 의식을 제거하는 방법이죠. 이 작업은 모레 실시하기로 결정됐어요.”


“모레면 6월 1일……, 지방선거일이네?”


“일부러 그날을 잡은 건 아닌 것 같은데 공교롭게도 선거하는 날이네요.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어요.”


“이상한 점이라니……?”


“삼성역의 케이사이지니 해킹 사건 있잖아요. 기억나세요? 그때 CW미디어도 함께 해킹 당해서 난리 났잖아요.”


“그래, 당연히 기억하지.”


“이번 조사 때 케이사이지니 해킹 사건도 함께 조사했는데, 한국뇌과학연구원을 공격한 해외 아이피 주소랑 케이사이지니와 CW미디어를 공격한 곳이 일치했어요.”


나는 이미 한빛나리에게서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이다.


“그게 이번 사건과 어떤 관련이라도 있어?”


“그래서 우리 수사팀이 케이사이지니에 영상을 송출하는 프로그램 운영체제를 분석했어요. 그런데 매년 특정 날짜에만 어떤 문구와 영상이 실행될 수 있도록 소스코드가 변경돼 있는 게 밝혀진 거예요. 이상하다는 건 실행되도록 입력된 그 문구와 영상이 좀 엉뚱한 내용이었기 때문이에요.”


“엉뚱하다니?”


“아빠 생신을 축하하고 사랑한다는 내용이었거든요. 뉴스로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사실은 그 문구를 담은 영상이 케이사이지니와 CW미디어가 담당하는 지하철 동영상 광고매체들에 한 번 송출된 적이 있어요. 그런데 매년 그 날짜에 영상이 송출되도록 해놓았으니 의아할 수밖에요. 기존의 해킹 사건과는 전혀 다른 유형이어서 모두들 힘들어 해요. 도대체 해커의 진짜 의도를 알 수가 없으니…….”


“혹시 그 특정일이 언제지?”


“가만있어 보자, 여기 있네요. 범인이 설정해놓은 날짜는 특이하게도 양력이 아니라 음력이었어요. 음력 3월 29일. 그래서 지난 4월 29일에 송출되었는데, 윤달이 낀 내년에는 5월 18일에 송출되도록 해놓은 거죠.”


소울이는 내 생일 이벤트를 매년 열어줄 계획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것보다는 ‘범인’이라는 처남의 표현이 내 가슴을 더 아프게 만든다.

 

특별조사단의 계획대로라면 소울이는 지금 최 박사의 뇌 오가노이드 속에서 철저히 고립된 채 이틀 전부터 화학약물의 공격을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바로 오늘, 고전압의 전류에 의한 전기 충격을 받아야 한다. 플랑크톤처럼 이곳저곳 흘러 다니지 말고 한 곳에 뿌리내리기를 바랐는데, 하필이면 정착하려는 바위가 최 박사의 뇌 오가노이드라니…….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오전 11시 현재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의 투표율이 12.0퍼센트로 집계됐다고 밝혔습니다. 이는 2018년 7회 지방선거의 동시간대 투표율인 15.7퍼센트보다 3.7퍼센트포인트 낮은 수치로서, 전체 유권자 4430만 3449명 가운데 531만 2743명이 투표에 참여했습니다.’


점심시간이 거의 다 되어 갈 무렵 실시간으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지방선거 투표율을 알려주는 뉴스가 나오자 갑자기 햇살이 날카롭게 울부짖는다. 햇살이 이처럼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울부짖는 모습은 처음 본다.

 

햇살이 이상 행동을 시작한 것은 5일 전부터다. 갑자기 사료를 전혀 입에 대지 않고, 캣타워가 아니라 소파 밑에서 무기력하게 하루 종일 숨어 있기만 했던 것. 어쩌다 소파 밑에서 나와도 고개를 빳빳이 들고 마치 식빵 모양처럼 웅크린 자세를 오랫동안 취했다. 5일 전은 최 박사의 뇌 오가노이드를 파괴하기 위한 첫 단계로 영양 공급을 차단한 날이다.


그제부터는 숨쉬기를 힘들어 하며 재채기를 반복적으로 해대는가 하면, 반려묘 화장실로 만들어준 배변용 모래를 먹었다. 그러고는 화장실이 아니라 소울이 침대와 옷장 같은 곳에 배변을 누었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울부짖고 있는 햇살을 달래주려고 다가가자 햇살은 꼬리를 치켜들며 내게 공격적인 태도를 취한다. 마치 반려견처럼 스킨십을 좋아하던 햇살의 갑작스런 변화에 나는 당황해서 뻣뻣이 굳어버린다.


그러자 햇살은 마치 공격 대상을 다른 곳으로 바꾸기라도 한 듯이 발톱을 날카롭게 세우고 허공에다 펀치를 날려대며 집 안 곳곳을 돌아다닌다.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의 투표율이 50.0퍼센트로 집계됐습니다. 코로나19 확진자의 투표가 조금 전인 오후 7시 30분에 끝났지만, 투표 대상자인 확진자는 약 8만 명밖에 되지 않아 전체 투표율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리고 지상파 방송 3사의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구 출구조사 결과, 광역단체장 17곳 가운데 B당이 10곳, A당은 4곳에서 각각 1위로 조사됐습니다.’


오후 내내 큰 소리로 야옹거리며 허공에 대고 발길질을 하거나 소파 밑에 숨기를 반복하던 햇살은 저녁 무렵 출구조사 결과를 알리는 뉴스가 나오자 현관문으로 향하더니 발톱으로 긁어댄다. 나는 햇살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펫토이를 현관 앞으로 가져가 공놀이와 깃털 흔들기 등 모든 기능을 다 작동시키지만 소용없다.


혹시 현관문 밖에 무언가가 있나 싶어서 살짝 문을 여는 순간, 종잇장처럼 몸을 구긴 햇살이 그 좁은 틈새로 쏜살같이 뛰쳐나간다. 계단으로 내려간 햇살을 따라잡기 위해 나는 다급히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다.

 

하지만 5층에서 올라오던 엘리베이터가 층층마다 멈춰서며 애를 태운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서 나도 계단을 따라 뛰어 내려간다. 숨을 헐떡이며 공동현관 밖으로 나가 어린이놀이터와 아파트 후문 쪽을 살펴보지만, 햇살은 이미 모습을 감춘 뒤다.

 

햇살이 즐겨 찾는 버스정류장 뒤쪽의 인조석과 아파트 주변 어디에서도 햇살을 찾을 수 없다. 해가 수평선 뒤로 훌쩍 넘어가 육안으로 사물의 윤곽만 겨우 알아볼 수 있다. 멀리서 다가오는 것이 개인지 늑대인지 구별할 수 없는 ‘개와 늑대의 시간’인 셈이다. 하지만 내겐 지금이 ‘개와 고양이의 시간’이다. 멀리서 스쳐 지나가는 강아지가 있으면 혹시 햇살인가 싶어 급히 쫓아가다 번번이 발길을 돌린다. 박명이 완전히 사라진 후 가로등 불빛에 갈기갈기 조각나고 있는 어둠을 뚜벅뚜벅 밟으며 나는 집으로 돌아온다.

  

조금 늦은 시간이지만 나는 휴대폰을 집어 통화 버튼을 누른다. 확인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다.


“병린아, 지금 통화 가능해?”


“네, 매형. 말씀하세요.”


“최 박사팀의 뇌 오가노이드에 깃든 의식 말이야. 오늘이 물리적으로 파괴하는 날이라고 했잖아. 작업 결과가 어떻게 됐나 궁금해서 전화했지.”


“아, 네. 성공한 것 같아요. 작업 후 뇌파 검사를 시행한 결과, 이전과 달리 평탄하고 규칙적인 것으로 나타났거든요. 마치 아무 것도 없는 백지 상태처럼요. 며칠 두고 봐야겠지만, 일단은 특별조사단과 저희를 포함한 정부합동수사팀 모두 오케이 사인을 냈어요.”


“아무 것도 없는 백지처럼? 많이 아팠을 텐데…….”


“네? 뭐, 윤리적으로는 논란이 될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없죠. 그러니까 생각나는데, 한빛나리만 반대 의견을 냈어요. 한빛나리 기억하시죠?”


“한빛나리가 반대 의견을 내다니?”


“NCSC 대표로 참여한 한빛나리만 이번의 작전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거든요. 최 박사의 뇌 오가노이드에 스며든 의식이 만약 인간과 동등한 수준이라면, 이를 제거하는 것은 생명권을 침해하는 행위로서 윤리적으로 논란이 될 수 있다는 입장이었어요.”

 

“인간과 동등한 수준……, 생명권을 침해하는 행위라. 정말 한빛나리가 그런 말을 했어?”


“네. 매형을 직접 불러서 조사까지 한 당사자치고는 좀 의외의 발언이어서 저도 약간 놀랐어요.”


단독주택 같은 곳에 차려진 조사실에서 종잡을 수 없는 질문으로 집요하게 나를 몰아붙이던 한빛나리의 모습이 생생히 떠오른다. 어쩌면 천재 해커는 이미 그때부터 ‘보라매날다’의 진짜 정체를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 고마워. 새로운 사실이 있으면 언제든지 나에게 좀 알려줘.”


“네, 그럴게요. 그럼 들어가세요.”


이 세상에 소울이의 또 다른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이 나 말고도 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묘한 감정이 든다. 기쁨? 슬픔? 안도감? 가만히 생각해보니 인간의 감정을 나타낼 수 있는 단어의 수가 과학적 발견으로 만들어진 그간의 수많은 용어보다 너무 적은 것 같다.

 

소울아, 이제 넌 어디에 있니?    다음날 오전, 주말이 아닌데도 나는 아내에게 가려고 집을 나선다. 병실에 들어서니 장모가 호흡이 불안정한 딸을 위해 가래를 뽑아내고 있다. 야간에만 간병인을 쓰는 탓에 장모는 매일 낮에 출근해 두 시간마다 아내의 몸을 앞뒤로 뒤집어주는 일과 마사지를 반복한다.

 

“민 서방이 어쩐 일이야? 가만있어 봐, 오늘이 목요일인데?”


“그냥 왔어요. 오늘은 일도 좀 한가하고 해서요.”


장모는 뜻밖의 방문에 반가운지 나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늘그막에 괜한 고생을 안겨 드리는 것 같아 뵐 때마다 늘 죄송스럽다. 병동 옆의 작은 공원에서 아내에게 오카리나를 연주해주던 장모의 모습이 갑자기 떠올라 가슴이 아리다.


“제가 할 테니 좀 쉬세요.”


“아냐, 난 이거 할 때가 제일 행복해. 목구멍 속의 가래를 뽑아주면 연빈이가 편한 표정을 짓거든.”


만날 멍하니 눈만 끔벅이는 아내를 돌보면서도 장모는 뭐가 불편하고 편한지를 금방 알아차린다.

 

“민 서방, 그런데 말이야. 어제 연빈이가 눈물을 흘렸어.”


“갑자기 눈물이라뇨?”


“연빈이 눈이 하도 건조해서 의사 선생님이 눈에 테이프까지 붙이곤 했잖아. 그런데 어제는 눈물을 줄줄 흘려서 내가 깜짝 놀랐지 뭐야.”


어제라면 최 박사의 뇌 오가노이드가 파괴된 날이다.

 

“어제 몇 시쯤 눈물을 흘렸나요?”


“점심 먹기 전부터 시작해서 오후 내내 눈물을 흘렸어. 민 서방, 이거 좋은 징조 같지?”


장모님은 늘 저런 식이다. 아내가 평소와 약간만 다른 행동을 해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눈빛을 반짝이곤 한다. 그런데 점심 먹기 전이라면 며칠 전부터 축 쳐져 있던 햇살이 갑자기 울부짖기 시작한 때다. 혹시 아내도 소울이가 정말로 떠나는 순간을 알았던 걸까. 내가 오늘 온 이유를 아내도 이미 알고 있었던 걸까. 나는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고 있는 아내의 눈길을 따라 고개를 돌리고 만다.

 

장모님과 함께 병원 근처에서 점심식사를 한 뒤 나는 혼자 집으로 향한다. 집에 거의 도착할 무렵 휴대폰에서 문자 메시지 수신을 알리는 소리가 들린다. 확인해 보니 발신자가 단풍이야기다.


‘안녕하세요. B라코차님. 당사의 고객 보상 경품 이벤트에서 최우수상에 선정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상품인 노트북은 고객님의 주소로 택배 배송되었습니다. 정보가 정확하지 않거나 장기 부재중일 경우 상품이 반송될 수도 있으니 일주일 내에 상품이 도착하지 않을 경우 당사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도 단풍 이야기는 고객님의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단풍 이야기 운영진 일동 올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지난 4월 중순쯤 단풍이야기에서 경품 이벤트에 응모되었다는 이메일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는 아이템 확률 조작 사건으로 인한 보상 차원에서 모든 고객들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이벤트에 자동 응모된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제는 알 것 같다.


“아빠, 노트북 하나 새로 사. 그러면 도서관에 갈 때도 편할 텐데.”


소울이는 내가 도서관에서 복사해온 자료를 집에 와서 다시 워드 작업으로 옮기는 모습을 볼 때마다 신형 노트북을 하나 장만하라고 말하곤 했다. 내가 연구원에 다닐 때 쓰던 노트북은 배터리 성능도 좋지 않고 구형이라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다.

 

단풍이야기에서 보낸 경품은 사흘 뒤 도착했다. 포장 박스를 열어 보니 뽁뽁이로 겹겹이 둘러싸인 또 하나의 박스가 들어 있다. 나는 문구용 칼로 조심스레 뽁뽁이를 제거하고 박스를 개봉한다. 그 안에는 하얀색 노트북과 충전케이블, 어댑터, 그리고 제품 사용 설명서가 들어 있다.


내 컴퓨터와 책상이 있는 안방은 한낮에도 볕이 잘 듣지 않는 편이다. 나는 안방 대신 햇볕이 잘 드는 거실의 탁자 위에 새로 받은 노트북을 설치한 뒤 워드 프로그램을 실행시킨다. 거실 창밖을 바라보니 어느새 서녘 하늘에 짙은 노을이 드리워 있다. 하지만 저녁놀은 비스듬히 마주보고 있는 104동 건물에 가려 곧 사라지고 만다.

 

노트북의 하얗게 비어 있는 화면만 무심코 바라보고 있는데, 뒤쪽에서 잘 익은 밀감 빛의 저녁놀이 집 안으로 슬며시 스며든다. 자리에서 일어나 살펴보니 그 빛은 주방의 창 너머로 바라보이는 63빌딩에 반사되어 집 안을 비추고 있다. 나는 그동안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했던 소울이의 영혼에 대한 이야기를 워드 프로그램의 하얀 화면에 쓰기 시작한다. 


  ‘거실 창으로 노을이 스며든다. 노을의 니은은 빨갛고 두 번째 글자의 이응은 주황이다. 그런데 두 자음이 합쳐지면 슬픔이 되고, 때로는 아련함이 된다. 나는 하루에 해가 두 번이나 질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해가 두 번 지는 게 아니라 두 번의 저녁놀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겠다. 나는 두 번째 노을을 바라보면서 건물의 유리벽에 반사된 노을빛에도 여전히 슬픔과 아련함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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