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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oookong Feb 22. 2018

나무의 공평(公平)

가지와 뿌리의 데칼코마니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의 한 구절이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들녘에 핀 풀꽃들도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바라보면 이제껏 발견하지 못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는 아주 따뜻한 시이다. 오늘 북한산 자락에 의젓하게 피어있던 작은 풀꽃들과 평범한 나무들에게 건네던 내 인사말과도 닮은 구절이기도 하다.

  

멀리서 보면 큰 덩어리로 보이는 산은 그 안으로 들어가 볼수록 무심할 정도로 소박하고 익숙한 자연으로 가득하다. 하나하나의 객체들은 각자의 픽셀로 색을 내고, 성장하고, 어우러지다가 사라지고, 또다시 생겨나는 일련의 삶을 살아가며 그 큰 덩어리를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등산을 취미로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내가 혼자서 비교적 낮은 원효봉에 오르겠다고 나섰다. 언제나 그렇듯 산 위로 올라갈 때는 그저 열심히 정상을 향해가기에 코 앞에 있어도 보지 못하는 풍경들이 많다. 목적지를 향해 온 신경을 몰두하던 그 길에 스쳤던 이 나무 숲길처럼 말이다. 하산을 하면서 이 길을 마주했을 때, 이미 산의 정기를 받아 충만해진 감성 탓도 있었겠지만 문득 정중하게 양쪽으로 나뉘어 선 나무들로부터 좋은 길을 안내받는 기분이 들었다. 필시 그 기분은 나 스스로 환영받고 싶었거나 의식하지 못한 외로움을 기대고 싶었던 착각이었을 것이다. 낯 뜨겁지만 그럴수록 더 뻔뻔하게 나무들을 쓰다듬으며 '고마워' '반가워'라며 혼잣말로 인사를 건넸다. 이 세상에서 나 말고 우리의 인사를 아는 사람은 딱 한 사람, 인기척 없이 뒤따르던 등산객이다. 어쩐지 안도감이 들었다.  



가파른 길 아래로 몸이 쏟아질 듯 발을 구를 때면 여지없이 나무들에 의지해 중심을 잡았고, 어떤 때는 나뭇가지도 아닌 가지 끝에 걸린 마른 지푸라기라도 붙잡으며 겨우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러기를 한참만에 드디어 평평한 지대가 나왔고, 나는 숨길 수도 없이 가뿐 숨을 몰아쉬며 나무 한 그루에 시선을 멈추어 잠시 사색에 잠겼다. 아주 오랜 시간, 저 아래 땅 밑으부터 물과 양분을 끌어올리고 위로는 태양과 바람의 빛과 공기를 받아들였더니 애초에 가느다란 실뿌리는 나뭇가지처럼 굵어져 단단한 기지를 뽐내고, 나뭇가지는 그 끝마다 제각각 다른 방향으로 자신 있게 뻗어 있었다. 그 자존감을 등에 업고 잎새들은  계절마다 다른 색 옷으로 다시없는 맵시를 한껏 뽐내며 살아가고 있었다. 나무의 삶이었다. 또 우리의 삶과도 같았다. 



혼자서 밥을 먹는 것도, 물건을 옳게 잡는 것도 심지어 몸을 뒤집는 것조차 스스로 할 수 없었던 실뿌리 같던 우리도 가족의 보살핌을 받고, 사회의 다그침을 겪으며 굵고 단단하게 성장해간다. 크고 작은 희로애락을 통해 차디 찬 바람을 피하는 방법과 데일듯 뜨거운 눈물을 멈추는 방법도 터득하게 된다. 물론 찬란한 햇살에 행복을 느껴보기도 하고, 든든한 양분에 더없이 만족스러운 순간도 맛보게 된다. 누구나 각자의 성장통을 무기로 나만의 생활방식, 개성과 자유를 패셔너블하게 드러내며 살아가는 것이다. 나뭇가지들이 일관된 방향 없이 서로 얽히고 엉켜 각자의 하늘로 뻗어가듯 우리도 그 안에서 관계를 맺고, 경쟁을 하며, 서로 기대어 살아가듯이 말이다.

  

나는 사색에서 빠져나와 온전하게 나무를 마주 보았다. 나뭇가지와 뿌리 사이를 반으로 접어보았더니 둘은 데칼코마니처럼 공평한 아우라를 갖고 있었다. 마치 살면서 받아들여야 하는 것들과 드러내야 하는 것들로 가득한 우리의 인생처럼. 이는 아픈 만큼 성숙하다는 명언처럼, 또 뿌린 대로 거둔다는 속담처럼 그리고 가진 만큼 나누자는 표어처럼 진지한 가르침이었다. 지금 아직 굵어지지 않은 뿌리도 그 나름의 힘이 있고, 아직 뻗지 못한 가지도 그 나름의 방향이 있다. 나무를 통해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존재함, 건재함이었다. 삶에 지쳐있는 우리들이 다시 호흡하고 활동해야 한다는 것. 더 많이 받아들이고 더 옳게 표현하고, 우리 그대로의 삶을 순환시켜야 할 것만 같다. 그것이 세상을 대하는 가장 공평한 스스로의 자세가 아닐까.



글|사진 ⓒ dooookong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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