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들에게는 예상치 못한 좋은 구경거리였다
나는 우연히 회현사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원근감에 짓눌린 확성기 소리가 멀리서부터 왕복 6차선 도로를 따라 밀려오기 시작했다. 경찰들은 도로를 통제하고 있었다. ‘탄핵무효 거리행진’ 때문이었다. 전날 안국역 인근에서 겪었던 일이 떠오르며 다시 가까이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행렬의 끝이 어딘지 모르게, 시야에 닿는 도로 너머로도 인파가 이어졌다. 행진을 역행하며 그들의 끝자락을 더듬어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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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들은 행렬의 인파와 도심의 시민들 사이에서 경계선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보호구를 착용한 모습이었다.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현장이기 때문이었다. 왜곡된 분노가 엉뚱한 곳으로 향하게 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행렬의 가장자리에서 누군가 경찰에게 다가왔다. 그는 짤막한 훈계를 뒤로 남기고는 유유히 떠났다.
“경찰이라고 애국자야? 당신이 헌법을 알아? 헌법도 모르면서 말이야. 사람이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헌법에 명시된 '집회·결사의 자유'를 지켜주느라 휴일조차 반납하고 거리에 나온 경찰은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헌법 제21조 ①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각종 구호가 거리에서 쏟아졌다. 표현의 자유를 가장한 아무 말이었다. 그 낱낱을 모두 글로 남기는 것은 바이트(byte) 단위의 용량조차 아쉬우므로 대표적인 몇 개만 기록한다.
“국회해산”
“탄핵무효”
“헌재해체”
“손석희를 구속하라”
“탄핵을 탄핵한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성조기가 등장했다. 인파를 거슬러 명동역 6번출구에 다다르자 ‘각종 깃발의 행렬’을 지켜보는 외국인이 눈에 띄게 많았다. 명동의 일상에 낯선 풍경이 겹친 모습이었다. 외국인 여행객은 흥미로운 듯 인파를 지켜보며 동영상과 사진을 찍어댔다. 미국에서 여행을 왔다는 그(이하 A)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눴다.
ㅡ지금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나왔는지, 당신은 아는가.
A: 물론이다. 어제 대통령이 탄핵됐다(impeached). 아마도 그것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저 사람들이 뭐라고 외치는 것인가?
ㅡ저들은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반대한다고 외치는 중이다.
A: 오, 그런가. 내가 알기로는, 박 대통령이 여러 잘못을 저질렀다던데. 흥미로운 일이다.
ㅡ저기 성조기가 보이는가. 어떻게 생각하는가?
A: 나는 말할 수 없다. 별다른 의견이 없다(I have no opinion). 그런데 저 사람들은 왜 성조기를 가지고 다니는 것인가?
ㅡ좋은 질문이다. 저 집회가 한국 기독교계와 관련돼 있다는 분석들이 있다. 한국에서 기독교가 자리 잡는 데는 미국 선교사들의 역할이 컸는데, 아마도 그런 이유로 한국 기독교는 미국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 같다. 그리고 저 사람들 중에서는 한국전쟁 당시와 그 이후 전후복구 과정에서 미국이 한국을 도왔기에 한국이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중시하는 게 보수주의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저들은 애국자와 보수주의자를 자처한다. 아마도 이런 이유들 때문에 성조기가 등장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내 말이 틀릴 수도 있다. 구글에 검색해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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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알겠다. 고맙다. 이따가 저녁에 호텔에 들어가면, 구글에서 찾아봐야겠다.
ㅡ저들의 시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A: 저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모습만으로 판단하자면, 폭력적인 형태나 물리적 충돌 없이 잘 이뤄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어제는 시위 중에 2명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ㅡ다른 의견은 더 없는가?
A: 세대차(generation gap)가 심각한 상황인 것 같다. 저 행렬에는 대부분 노인들뿐이다. 경찰을 사이에 두고 노인과 젊은 사람들이 분리된(divided) 모습이다.
외국인들이 일명 ‘태극기집회’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명동을 지나며 구경의 대상이 된 ‘각종 깃발의 대열’에 속한 사람들도 자신들을 지켜보는 외국인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들은 외국인들이 사진을 찍는 동안 그 앞을 지나며 태극기를 흔들어 보이고, 더러는 두 손으로 성조기를 펼치며 득의만면한 표정을 지었다. 인자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끄덕하는 그 모습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 나는 모른다.
세 명의 외국인은 어찌할 바 모르며 사진과 동영상을 찍는 데 열중했다. 자신들에게 사람들이 무어라고 말을 걸어오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간혹 영어로 말을 걸어오는 이들이 있을 때면 두 사람은 귀를 기울이곤 했다. 영락없는 미국인일 것으로 여겨진 세 사람은, 각각 포르투갈에서 짐바브웨에서 캐나다에서 온 유학생이었다. 서울의 어느 대학교에서 교환학생으로 왔다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세 명 중, 포르투갈에서 온 교환학생은 나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I think I can be a president if I want.”
미국인도 아닌 자신들에게 성조기를 흔들어대는 이유를 그들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왜 그토록 대화를 걸어오며 한국 대통령의 무죄를 자신들에게 호소하는지도 공감하기 어려운 세 사람이었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손에 쥔 사람들 중 일부는 외국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내 모습에 의심의 눈초리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윽고 내게 다가와서 ‘심문’하는 이도 있었다.
“지금 외국인들한테 뭐라고 말하고 있었어요? 우리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해주고 있었냐구요. 외국인들한테 제대로 말해줘야 돼요. 지금 박근혜 대통령이 억울하게 탄핵된 거라고. 이게 전부, 부패한 언론들의 ‘페이크 뉴스’ 때문에 지금의 사태까지 온 거라고 설명해줘야 된다구요. 뭐라고요? 이 정도 설명해줄 영어실력이 안 된다구요? 모르면 ‘네이버사전’에서 검색해보면 되잖아. 아무튼 설명하려면 제대로 설명해줘요. 박근혜 대통령은 아무 잘못이 없다고.”
인파의 끄트머리가 멀어져갔다. 소음이 닿지 않는 을지로의 어느 흡연공간. 의경 두 명이 지친 표정으로 벤치에 앉았다. 부산에서 서울로 지원을 나왔다고 한다. 금요일 밤에 올라와 2박3일 동안 서울에 머무르고 있는 중이란다. 두 의경은 “오늘 밤에는 ‘집’에 내려갈 수 있겠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다 타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문 채, 그들은 담배 한 대를 더 꺼내 손가락 사이에 쥐었다. 빌딩 유리창에 석양이 비치는 6시, 담배연기조차 지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