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바로 오징어 된장찌개
신아 그거 기억나나
뭐
할머니 오징어 된장찌개
크 그거는 레전드지 레전드
평생 잊지 못할 맛이 있다.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난 데도 그 맛에 대한 기억만큼은 DNA 깊숙히 박혀 있을 것처럼 강렬한 맛. 백종원도 맛봤다면 군말 없이 밥 두 그릇은 뚝딱 해치울 맛. 할머니가 끓여주셨던 오징어 된장찌개.
된장찌개에 오징어만 넣으면 될 것 같은 평범한 네이밍과 달리 그건 3대째 된장찌개만 끓였을 장인의 맛집도, 우리 엄마도, 이모 삼촌도 흉내 내지 못할 할머니만의 아이덴티티가 담겨있다. 제대로 묵은 고소한 된장에 입안 가득 동해의 푸른 향을 퍼뜨리는 짭쪼름한 오징어. 그 곁에서 보조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애호박과 두부, 양파가 적절한 조화를 이루는 그 맛은 맛본 지 거의 2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어제 먹은 삼겹살보다 더 또렷이 기억난다.
신이와 나는 아직도 종종 그 이야기를 한다. 나보다 세 살이나 어린 신이도 대여섯 살쯤 먹었던 그 찌개의 맛은 여전히 기억이 난다며 쩝쩝 입맛을 다시는 소리로 그 이야기의 마침표를 찍곤 했다. 다시는 먹지 못할 그 맛과 다시는 이생에서 만나지 못할 할머니를 함께 추억하며.
울릉도로 본격적으로 이사 오기 전 부산에 살고 있을 적, 맞벌이에 정신이 없으셨던 부모님은 내 방학 때가 되면 울릉도 할머니 집에 우리 남매를 맡겨 놓으셨다. 마냥 신났던 신이와 달리 나는 한동안 엄마 아빠를 그리며 밤마다 슬픔을 끌어안고 잠들었다.
할머니 집 앞에는 검은 돌이 가득한 해수욕장이 있었다. 파도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검은 돌에 부딪혀 새하얗게 부서졌고, 나는 알알이 흩어지는 물방울들을 바라보며 빨리 이 밤이 가기를 기도했었다. 밤잠이 없으셨던 할머니는 아마 화장실 가는 척 밖으로 나가 어둠 속에서 하염없이 엄마 아빠를 그리워하는 나를 말 없이 지켜보고 계셨을 테고, 파도만큼 여린 그 마음도 몇 번이고 부서지셨을 테다.
그 마음을 애써 숨긴 채 부모님의 빈 자리를 든든한 밥으로라도 대신 메워주기 위해 열심히 오징어 된장찌개를 끓여주셨으니 그 구수함은 우리 할머니의 정(情) 맛이고, 그 짭조름함은 할머니의 애달픔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할머니의 사랑 덕분에 다는 금세 울릉도 생활에 적응했다. 방학 일기 숙제는 새까맣게 잊은 채 여름에는 시원한 콜라를 들이켜며 태풍 치는 날에도 수영을 했고, 겨울에는 손 시린 줄도 모르고 눈사람 아니 눈사람 부족들을 만들어댔다. 방학이 끝날 무렵, 엄마 아빠가 우리를 데리러 오기 전 밀린 일기를 몰아서 쓰느라 진땀 뺐던 건 여전히 할머니와 나 사이의 비밀이다.
그렇게 몇 번의 방학을 울릉도에서 보내고 10살쯤 울릉도로 완전히 이사하며 내 키가 매년 1-2cm씩 자랄 때 그만큼 할머니의 등은 땅으로 굽었다. 점점 걷기 힘들어하시더니 요양병원에 입원하셨고, 언젠가부터 당신의 아들딸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되셨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이별의 그림자가 더 깊이 드리워졌다.
병원에서도 더는 해줄 것이 없다는 말에 큰이모는 바로 할머니를 집에 모셨다. 큰이모 작은이모가 서로 자기 집에 할머니를 데려가겠다고 시시한 실랑이를 벌였다. 할머니의 약해진 기억력이 이 순간을 꼭 잡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할머니의 한평생이 마침내 일군 흔적일 테니.
며칠 지나지 않아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다시 입원한 할머니를 뵈러 갔다. 아이처럼 티 없이 맑은 미소를 지으며 베드 위에 누워 계셨던 할머니는 당신 곁을 든든한 성벽처럼 둘러싸고 있는 자식들을 아예 알아보지 못했다. 다만 병실에 갓 들어선 나와 신이를 보자마자 어느 때보다 힘 있는 목소리로 우리 이름을 불러주셨다.
우리 연이 아이가 연이
이모들은 딸들은 못 알아봐도 손자 손녀들을 기억해내는 엄마를 신기해하면서 가슴 아파했다. 어떤 마음으로 우리를 한눈에 알아보셨을지 나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막내딸의 딸 이름을 누구보다 반갑게 부르던 할머니의 목소리. 그것이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내 이름을 불러준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할머니는 수의를 곱게 차려입고 드디어 울릉도를 벗어나 훌훌 날아가셨다.
할머니는 세 딸과 맏아들, 그들의 배우자와 손자 손녀들, 수많은 동네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먼 길을 떠나셨다. 장례 내내 울고 흐느끼고 오열하던 엄마와 이모, 삼촌은 장례를 마무리한 뒤 큰이모네 거실에 모여 앉아 ‘우리 엄마가 그때~’로 시작하는 정다운 옛이야기를 나누며 깔깔거렸다. 할머니의 육체적 시간은 끝났을지언정, 우리 추억 속에는 여전히 할머니가 존재했으므로 완전히 떠나진 않으셨구나,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겠구나 싶어 덜 섭섭해졌다.
당장 나조차도 할머니를 떠나보낸 지 1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할머니의 고소한 살냄새, 쭈글쭈글하던 손의 주름, ‘우리 강아지’하고 안아주실 때마다 느껴지던 온기, 좋아하셨던 황진이의 시조를 필사해두신 노트에 담긴 글씨체, 목소리, 웃는 얼굴, 발걸음, 그리고 오징어 된장찌개의 맛까지 오래된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내세라는 것이 꼭 존재하길 바란다. 더 나아가 다음 생에 다시 할머니와 손녀로 만난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그때 DNA 깊이 남아있을 강렬한 오징어 된장찌개의 맛을 퍼뜩 떠올려 말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마자 할머니에게 식당을 차리라고 부추겨야지. 그래서 우리 할머니 부자 만들어드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