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하고 0.5살을 더 먹을 무렵에 몹시 아팠다. 몸이 아닌 마음이 아팠다.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났다. 웃고 있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입꼬리를 억지로 올리고 있어야 하는 게 힘겨웠다. 올라가는 입꼬리는 낚싯대 같았고 가라앉은 마음은 낚싯바늘에 찔린 것처럼 콕콕 쑤셨다. 눈앞에서 쌩하니 지나가는 자동차가 두렵지 않았다. 지하철이 들어올 때만 열리는 스크린도어가 미웠다. 그때는 뭐랄까 슬프다기보다 허무했다. 우울증은 우울하게 만드는 병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지우는 병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살고 싶은 의욕은 없었지만 삶을 등질 수는 없었다. 내게는 엄마와 아빠와 동생과 친구들이 있었으니까. 혼자서 씩씩하게 병원을 찾았다. 의사 선생님은 내가 의자에 앉자마자 ‘어디가 아파요?’라고 물었고, 나는 내 아픔을 묻는 그 다정한 목소리에 울음으로 답했다. 선생님은 으레 있는 일이라는 듯한 손짓으로 티슈를 뽑아 건넸고 나는 소리도 안 내고 투둑투둑 떨어지는 눈물을 닦았다.
여러 가지 질문이 있었다. 어렴풋이 이 우울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던 문제는 사실 껍데기에 불과했고 근원지는 더욱 옛날의 기억과 깊은 심연에 존재했다. 부끄럽기도 했고 속상하기도 했지만 주어진 질문에 성실하게 답했고 그 보상으로 처방전을 받아왔다. 눈가는 팅팅 붓고 벌게졌지만 손안에서 바스락거리는 하얀 약봉지를 보니 이제 다 괜찮아질 것만 같은 희망이 차올랐다. 제 마음을 스스로 보살필 줄 아는 어른이 된 듯한 기특함도 덤으로 따라왔다.
처음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으려고 했다.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걸리는 당연한 병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우울증이라는 병 앞에 붙여야 하는 원인이란 수식어를 구구절절 읊고 싶지가 않았다. 그런데 엄마에게는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티를 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내 비밀을 털어놓을 상대로 엄마는 가장 만만했고 믿을 만했다. 전화로 ‘엄마 할 말 있어.’ 하고 말을 꺼낸 기억은 나는데 그 이후의 기억은 흐릿하다. 엄마는 생각보다 덤덤했고, 괜찮아질 거라고 다독여줬고, ‘엄마가 한 번 나갈까?’ 하고 물어서 ‘괜찮다. 애들 나온다.’ 하고 답했던 기억이 전부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는 덤덤하지 않았을 테다. 모든 게 당신 때문이라고 탓했을 것이고, 어쩌면 달밤에 잘 마시지도 못하는 소주를 걸쳤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슬픔은 나누어도 작아지지 않는다.
한창 관광객이 많아 바쁠 시기에 나를 보러 나온다는 엄마에게 괜찮다고, 곧 애들이 나올 거라고 한 대답에서의 ‘애들’은 울릉도 친구들이었다. 울릉도에서 상근 근무를 하는 친구들과 인천, 포항에서 각각 대학 생활을 하고 있던 친구들이 부산으로 오기로 한 것이다. 이 친구들에게도 내 병을 알릴 생각은 없었다. 그냥 3일 동안 재밌게 놀아야지 마음껏 웃고 떠들어야지 하는 기대뿐이었다. 나도 모르게 ‘안 가면 안 돼? 나 아프단 말이야.’ 하는 어리광을 피우게 된 건 친구 한 명이 먼저 간다고 말하던 타이밍에서였다. 2일동안 부산 이곳 저곳을 헤집고 다니며 약이 필요 없을 정도로 행복했는데 생각보다 더 빨리 떠난다는 친구를 보내줄 자신이 없어서 내 아픔을 이용한 것이다. 그때 친구들도 알게 됐다.
나를 혼자 부산에 남겨두고 떠나기 전 친구들은 오랫동안 내 손을 하나씩 붙잡고 있었다. 달리 말도 하지 않았다. 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내 손을 따뜻하게 감싸주고는 차가운 새벽 공기를 등지고 가야 할 자리로 돌아갔다.
3일 내내 행복하기만 했던 기억은 그만큼 큰 빈자리를 남겼다. 사랑한 자리마다 폐허였다. 찜질방에서 복작복작거리며 잠들었던 시간은 사라지고 좁은 기숙사 침대에 누워있는 시간만이 남았다. 가만히 천장만 보고 있을 뿐이었는데 눈물이 새어 나왔다. 나사가 하나 빠진 것처럼 무력한 시간이 다시 시작되었다. 하지만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었다. 그저 기쁠 때 함께 기뻐하는 사이라고 생각했던 친구들이 반려동물 밥 챙겨주듯 부지런히 내게 연락을 해왔다.
괜찮냐고, 어찌 된 일이냐고 묻는 상투적인 걱정은 없었다. 그냥 밥은 잘 챙겨 먹었냐, 뭐 먹었냐, 나는 오늘 이런 일들이 있었다, 너는 어땠냐 이런 말들을 건네줄 뿐이었다. 약은 내 우울한 기분을 잠재우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약을 먹고 나면 취한 듯 몽롱해진다. 친구들의 연락은 달랐다. 약 때문에 초점이 나가서 흐릿해진 정신의 조리개를 뚜렷하게 잡아주었다. 제정신으로 있어도 고통스럽지 않았다. 함께 보냈던 즐거운 학창 시절을 떠올리게 했고, 눈물 대신 웃음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고, 그러다 살 의지를 되찾았고, 그래서 자주 고마웠다.
5년을 봤지만 우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한 친구가 있었다. 몽롱한 상태로 잠에 들려던 어느 날 밤에 그 친구로부터 문자가 왔다. 아주 장문의 문자였는데 시간이 오래 지나 기억나지 않지만 이 내용만큼은 선명하다. “니만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올해로 이 친구를 알게 된 지 14년이다. 반평생을 함께 했는데 아직도 우는 걸 보지 못했다.
그렇게 숱한 밤들이 흘렀다. 매일 밤 눈물로 촉촉이 젖어 염전과 맞먹을 염도에 절었을 베개는 제 기능을 되찾기 시작했다. 하루 3번 꼬박꼬박 챙겨먹던 약의 양도 줄어들었다. 몽롱한 날보다 선명한 날이 많아졌고, 약을 먹음과 동시에 곤두박질친 기억력도 점차 회복되었다. 마침내 새하얀 약봉지와 이별할 날이 왔다. 친구들에게 기쁜 소식을 알렸다.
"나 이제 약 안 먹어도 돼."
‘축하한다. 장하다.’ 나보다 더 기뻐하는 친구들의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약을 안 먹어도 된다는 사실보다 이 친구들의 염려를 덜어주었다는 게 더 다행스러웠다. 너무 극적이라 나조차 믿어지지 않는 이 날 이후로 나는 사랑 지상주의자가 되었다.
"너도 사랑지상주의자니? 사랑이 언제나 행복과 기쁨과 설렘과 용기만을 줄 거라고?"
"고통과 원망, 아픔과 절망과 슬픔과 불행도 주겠지. 그리고 그것들을 이길 힘도 더불어 주겠지. 그 정도는 돼야 사랑이지."
"그런 건 누구한테 배웠니?"
"사랑한테 배웠지."
<괜찮아, 사랑이야> 중
사랑은 그 정도다. 고통과 원망, 아픔과 절망과 슬픔과 불행을 주는 동시에 그것을 이길 힘도 준다. 내가 사랑한 자리마다 폐허가 되었지만 그 자리에 다시 집을 지을 용기를 준 것도 사랑이었다.
사랑의 힘은 강력하다. 그 사실이 너무 뻔하고 유치하고 또 순진해 보여서 쉽게 믿고 싶지가 않다. 하지만 그 힘을 직접 경험한 이상 인정하는 것 외에 별다른 수가 없다. 가끔 생각한다. 나를 밤마다 살게 해준 친구들이 없었다면, 방 안에 처박혀있던 나를 계속 불러내 주던 친구들이 없었다면, 덤덤히 달래주던 엄마가 없었다면, 매일매일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아빠가 없었다면, 언제나 눈에 밟히는 동생이 없었다면,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가 없었다면 나는 약만으로 버틸 수 있었을까?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을까?
사랑보다, 사람보다 더 강한 것은 없다. 어떻게 배웠냐고? 사랑한테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