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의 주인 10
오리엔테이션. 대학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낯설었다.
모두가 새내기에게는 친절했지만, 그 친절함조차 불편하게 다가왔다. 나는 늘 긴장한 채로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누군가 먼저 말을 걸어 주어야 겨우 인사를 건넬 수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사람을 무서워하게 되었다는 것을.
새로운 환경이 주는 설렘은 긴장감에 짓눌려 금세 사그라들었다. 앞으로의 대학 생활을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 고민되었다.
나는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아름다움과 멀어지고 싶었다. 긴 생머리로 대표되던 시대의 아름다움과도, 한창 예쁠 나이라는 시절의 아름다움과도 멀어지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보글보글한 ‘아줌마 파마’를 하고 화장도 하지 않았다. 억센 사투리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예쁘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안전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복학생 Y가 내 앞에 나타났다. 꾸미지 않은 수수한 내 모습이 눈에 띄었다고 했다. 사투리를 고치지 않는 모습도 소탈해 보여 좋다고 했다. 대체 왜? 눈에 띄지 않기 위해 했던 파마가 오히려 튀는 모습이었던 걸까? 나는 분명하게 거절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그는 나의 거절을 ‘내숭’이나 ‘수줍음’으로 해석했다. 심지어 그런 모습이 여성스러워 더 마음에 든다며 떠벌리고 다녔다. 끈질긴 그를 피해 성큼성큼 빠르게 걷게 된 내 모습에 ‘매일 화난 여학생’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러나 도망치려는 사람에게 세상은 너무 좁고, 밝았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그를 마주치기 일쑤였다.
“싫어요.”
“아니에요.”
“됐습니다.”
학교 저수지 옆, 반년이 넘는 지루한 거절을 오늘로 분명히 끝내겠다는 생각으로 나간 자리였다. 하지만 그는 되레 나를 압박했다.
“내가 너를 따라다니는 걸 다들 아는데…
왜 안 만나 줘?
내가 물속으로라도 뛰어들어야 내 진심을 믿겠어?”
S와의 사건 이후 1년도 채 되지 않아 또다시 ‘죽겠다’라는 협박을 들었다. 몇 마디 말만으로도 지난날의 악몽이 눈앞에서 되살아나는 듯했다. 어째서 이런 상황에 다시 맞닥뜨리는 걸까? 내게는 이런 사람들만 끌어당기는 기운이라도 있는 걸까?
계속해서 내 말을 자르는 그에게 침묵으로 일관하자, 그는 나를 뒤로하고 저수지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성큼성큼 물속으로 들어가는 그에게서 자꾸만 창틀에 앉은 S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목이 메어 왔다. 누구라도 좀 지나가 주기를 바랐지만 아무도 없었다. 하필 휴대전화도 두고 온 날이었다. 물이 깊어진 모양인지 그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또 나 때문에 누군가 잘못되면 어쩌지?’
‘지금은 싫어도.. 노력하면 좋아질 수도 있지 않을까?’
다급해진 나는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만나주면 되겠냐”라고 하고 말았다.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그는 물 밖으로 나와 웃었다.
그 웃음이 싫었다.
엄청난 착각, 엄청난 판단 착오였다. 죄책감에 휘둘려 어리석은 짓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돌이킬 수는 없었다. 죽겠다는 말에 겁먹고, 거절을 생사의 문제로 둔갑시킨 그의 비열함에 속아 넘어갔던 내가 아직 부끄럽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그래도 나를 좋아한다고 하니, 친절하게는 대해 주리라는 희미한 희망을 떨리는 마음으로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