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를 잃고도

그림자의 주인 9

by 도란

그날 이후로 나는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과 기억을 모조리 구석에 밀어 두고, 내게 생긴 상처를 애써 돌아보지 않았다. 만약 자세히 들여다보았다면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 하나쯤은 얻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사람을 꿰뚫어 보는 눈, 위험을 미리 알아차리는 감각, 여론을 내 편으로 만드는 능력, 차분하게 조목조목 따지는 말솜씨, 혹은 빠른 상황 판단력 같은 것들 말이다. 하다못해 “참으라”는 말에 무조건 따르지 않는 용기라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그날들로부터 곧바로 도망쳤기 때문에.


살면서, 당시 나의 대처가 너무 소극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나 되돌아본 순간들이 몇 번이나 있었다. 만약 선생님 말씀을 순순히 따르지 않고 절대로 S와 같은 반에 있을 수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면? 정말 반이 바뀌었을지도 모르고, S가 학원을 그만두었을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더라도 최소한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 목소리를 내어도 된다는 것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집단에나 고유한 ‘분위기’가 있었고 ‘흐름’도 적당히 따라야 했다. 분위기를 깨지 않으려고 눈치를 보며 내 자리를 찾으려 고군분투했기에, 갈수록 내 목소리를 내는 것은 어려워졌다. 반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조용히 넘어가고 싶어서 ‘별일’을 ‘작은 일’로 축소하는 데 암묵적으로 동의하기도 했다. ‘네가 조금만 더 참으라’는 말에 설득당할 때, 무너지는 것은 한 사람분의 자존감뿐이었다.


슬쩍 덮어둔 ‘작은 일’이 무성해져, 참다 문제를 제기하면 ‘예민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지금까지 아무 문제없었는데 갑자기 왜 그러냐’고, 이제 와서 마음을 바꾼 이유를 묻기도 했다.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아니라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트러블 메이커가 되었다. 애써 꺼낸 고통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힘도 없었다. 더디게 흐르는 괴로운 시간 속에 지옥이 고이기도 했다. 모든 것이 스무 살 때 잘못 끼운 첫 단추 때문인 것만 같아, 나는 오랫동안 마음 아팠다.




한편, S가 나 때문에 수능을 망쳤다고 말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들렸다. 나는 그와 다른 대학에 진학했기에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더 이상 그와 같은 공간에 있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만족스러웠다. 그러면서 대학 생활은 좀 더 나을 거라고 내심 기대했다. 학원을 벗어나고 싶었던 나에게 대학은 희망과 기회의 땅이었다. 대학에서 만날 사람들은 겉으로라도 상식적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최소 4년은 함께해야 하니까, 좀 더 어른일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믿는 사람은 끝내 속는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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