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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랑 Oct 15. 2023

스페인 산티아고 도망길

아직도 눈을 감으면 생각나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아시나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가톨릭의 성지순례길입니다. 다양한 출발지에서 노란 화살표를 이정표 삼아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장까지 가는 여정이죠.


저는 아름다운 그 길로 도망쳤습니다.




재미없던 대학 생활이 절반쯤 지났을 때입니다. 한창 배낭여행이 유행하고 있었죠. 친구 중 한 아이도 유럽 배낭여행을 갔습니다. 프랑스부터 시작해 북유럽을 돌아 산타 할아버지도 만나고 왔대요. 한 달 만에 만난 그 애는 동화 같은 여행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저도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습니다. 당시의 저는 학교도 재미없었고, 알바에도 지쳤고, 가족들과 친하게 지내지도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친구와 같은 코스의 배낭여행은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 애의 아버지는 회장님이었고, 저는 버스 요금조차 아르바이트비로 대고 있었는걸요.


그래서 찾아낸 곳이 산티아고 순례길입니다. 한 달 정도의 시간 동안 저렴하게 떠날 수 있는 길이었죠. 저는 무작정 휴학을 하고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돈이 모이자마자 지도가 있는 안내 책자 한 권을 사고 부실한 배낭을 꾸렸습니다.


다급히 여행을 준비하는 동안, 순례길의 의미를 깊이 생각할 틈이 없습니다. 여행에서 뭘 얻고 싶지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제게 중요한 건 한 달이나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거였죠. 준비를 마친 저는 망설임 없이 현실에서 도망쳤습니다. 출발 직전에야 제 계획을 아신 부모님은 노발대발하셨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이미 비행기표를 끊었는걸요.




산티아고 순례길은 많은 미디어에서 소개되었습니다. 블로그에도 후기가 잔뜩이고요. 저도 그와 다르지 않은 길을 걸었습니다. 노란 화살표를 따라 스페인을 가로로 횡단하며, 다양한 지형과 날씨와 사람들을 만났지요.


순례길이 다른 여행지와 달랐던 점은 속도가 비슷한 사람들을 한 달 내내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만났던 사람을 내일 만나지 못하더라도, 일주일 안에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 동네가 다 같이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어요.


저는 걸음이 빠르지 않아서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주로 다녔습니다. 대부분 은퇴를 하시고 노년의 추억을 위해 부부동반으로 오신 분들이었습니다. 다들 얼마나 예뻐해 주셨는지 몰라요. 간식도 챙겨주시고 감기 기운이 있을 땐 약을 사다 주셨죠. 저는 다양한 나라의 어른들과 있을 때마다 활짝 웃었습니다.


걷는 시간을 짧게 잡고, 마을을 충분히 즐기고 싶어 하는 동년배들과도 자주 만났습니다. 호주에서 온 애나는 생수병에 포도주를 담아 마시고 다녔죠. 어떤 그리스 남자애는 체구가 커서 가끔씩 저를 번쩍 들어 올렸습니다. 스위스에서 온 마크는 어머니와 같이 왔는데, 옛날에 마약을 했었다는 충격적인 과거사를 들려주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온 다양한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그들이 이곳에 온 이유를 듣게 됩니다. 신앙심으로 온 사람도,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내면의 자신을 만나기 위해 온 사람들이 제일 많았던 것 같네요. 트래킹 같은 캐주얼한 목적으로 온 사람도 있었지요. 다들 어떤 목적이든지 순례길에 의미를 두고 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길에 온 이유에 대해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일상에서 도망치고 싶었을 뿐입니다. 꼭 순례길에 올 필요는 없었어요. 순례자 여권은 발급받았지만, 제 마음가짐은 순례자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괜스레 다리가 아프다던가, 날씨가 좋다던가로 대답을 돌리기 일쑤였습니다.




딱 한 명, 캐나다에서 온 애드리안에게는 솔직하게 말해보긴 했습니다. 어쩌다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그 애가 엉망이 된 제 신발을 고쳐주어서일까요? 그 애와 어마어마하게 큰 너도밤나무 위에 올라갔던 탓이었을까요? 그 애가 제 우울을 눈치채서 일까요? 아마도 그 모든 것이 이유겠지요.


안개가 자욱하던 날, 다정한 애드리안에게 제 심정을 떠듬떠듬 말했습니다.


“사실은 여기 온 이유는 없어. 그냥 내 삶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아무 데나 온 거야. 난 엄청나게 한심한 사람이거든.”


애드리안은 당황했는지 갑자기 먼 곳의 흐린 산맥을 헤아렸습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계속 걸었지요. 고도가 높아져 안개가 더욱 짙어질 때쯤에야 애드리안이 저를 돌아봤습니다. 그 애는 영어가 서투른 저를 위해 천천히 말해주었죠.


“You have light.”


틀렸어. 내 삶에 빛 같은 건 없어. 유치한 소리 하지 마.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의 파란 눈에 입이 붙어버렸습니다. 차라리 다행입니다. 바보같이 상냥한 그 애에게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려줄 필요는 없으니까요.




어쨌거나 도망은 순조로웠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일상은 매우 단순했고요. 아침해가 뜨기 전에 숙소를 나서고, 해가 지기 전에 다음 숙소에 들어갑니다. 다른 순례자들과 저녁을 먹고 함께 잠들죠. 단순하고 빈틈 없는 패턴 덕분에 한국에서의 현실이 잊혔습니다.


제게 순례길은 안전한 곳이었습니다. 이곳에는 미래에 대한 고민도, 실패도 없었습니다. 노란 화살표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니까요. 가끔씩 필요한 물건이 생겨도 걱정 없었습니다. 순례자 숙소에 가면 틀림없이 얻을 수 있었어요. 이전 순례자들이 깜빡한 물건들을 나눠 받을 수 있었거든요. 물론 저도 꽤 많은 물건을 숙소에 두고 왔습니다. 누군가가 잘 썼겠지요?

다만 혼자 걸을 때는 조금 쓸쓸했습니다. 가끔씩 주변에 사람이 하나도 없는 구간도 있었거든요. 다른 사람들은 그런 순간이 좋다고 했습니다. 내면을 성찰하는 명상의 시간 같다면서요. 저는 반대였어요. 혼자 걸을 때는 잊고 있던 현실이 떠올랐거든요. 한심한 대학 성적, 여유 없는 집안 형편, 꿈도 열정도 재능도 없는 제 모습.


그러나 아무리 울적한 순간에도 노란 화살표는 어김없이 나타났습니다. 제가 잘 가고 있다고 알려주는 표식이었죠. 화살표는 엉망진창인 저도 앞으로 갈 수 있도록 안내해 주었습니다.




한 달보다는 조금 더 빠르게,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했습니다. 함께 도착한 사람들은 모두 감격했습니다. 이상하게도 저는 기쁘지 않았습니다. 이 길이 끝나버린 것이 허무하고 슬펐습니다.


대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나니, 성당 근처 분수에 아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종종 만났던 그리스인 친구는 이번에도 저를 번쩍 안아 들고 빙빙 돌리기도 했죠. 우리는 광장 옆 계단에 다 같이 앉아 시원한 산 미구엘 맥주를 마셨습니다. 모두 싱글벙글이었습니다. 이 중에서 억지로 웃는 사람은 저뿐이었을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산티아고에서 조금 떨어진 피니스테레로 간다고 했습니다. 그곳은 스페인의 끝이었는데, 그 바다까지가 일반적인 코스라더군요. 하지만 저는 산티아고에 남기로 했습니다. 산티아고에 도착해도 전혀  좋지 않았는걸요. 굳이 피니스테레까지 가서 이런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았습니다.


애드리안은 바로 다른 나라로 떠난다고 했습니다. 이별 선물로 조그마한 목걸이를 주었어요. 목걸이에는 쇠붙이로 된 작은 천사가 달려있었습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자기가 그날 했던 말을 기억하라고 신신당부했어요. 아마 애드리안은 제가 그의 말을 믿지 않은 걸 알았나 봐요.




저는 산티아고의 한 오스딸에 일주일치 방값을 지불했습니다. 이를테면, ‘산티아고 일주일 살기’가 되겠네요.


한동안은 광장 계단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제 막 도착한 사람들 틈에서 아는 얼굴들을 찾았지요. 피니스테레에서 돌아온 사람들도 만났습니다. 하지만 3일쯤 지나자 아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는 대성당에서 미사를 보거나 산티아고의 골목을 돌아다녔습니다. 거기는 골목이 정말 많거든요.


일주일 정도 머무르면 산티아고가 좋아질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 마음에 드는 것이라고는 아몬드 케이크 정도였어요.


추워진 날씨에 낡은 옷을 버리고, 코트를 샀습니다. 저는 전혀 순례자 같지 않은 복장으로 한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일상은 하나도 바뀐 것이 없었습니다. 노란 화살표도, 완성된 목적지도 없는 현실이 실감 났죠. 변함 없는 현실처럼 저도 그대로였습니다. 여전히 성적도 나쁘고, 재능과 열정이 없는 한심한 사람이었어요. 달라진 건 오래 걸어서 빠진 체중뿐이었고, 그마저도 금방 돌아왔습니다.


저는 꽤나 자주, 노란 화살표가 있는 그 길을 그리워했습니다. 정확한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를 따라 걸었던 끝없는 지평선이 그리웠습니다.


그러나 그리움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습니다. 어차피 제 산티아고 도망길은 이미 끝났으니까요.




만약 순례길을 도망치듯 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만약 순례길에 가는 최소한의 이유를 가지고 떠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때의 저로는 절대 이유를 찾을 수 없을 테니 지금 정해 볼게요.


제가 정말 한심한지 알아보기 위해 순례길로 떠날 것입니다.


순례길에서 저는 한심하지 않았어요. 매일 쉬지 않고 끈기 있게 걸었습니다. 서툰 영어와 생존 스페인어로 소통도 잘했죠. 친절한 많은 사람들은 저 역시도 친절한 사람이었다는 증거일 테고요. 게다가 운도 좋았어요. 순례길에서 악명 높은 베드버그나 간간히 일어난다는 사건사고를 전혀 겪지 않았는걸요.


분명 산티아고 순례길을 통해 저도 괜찮은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었을 거예요.



그때의 기억을 날조합니다.


대학 시절, 유행에 편승해 한 달간 배낭여행을 간 적이 있어요. 제가 간 곳은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이었습니다. 순례길을 걸으며 자신을 돌아보고 싶었죠. 이곳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경험을 통해 제게도 장점들이 꽤 있단 걸 알았답니다.


여행에서 돌아오자 변함없는 일상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달라져 있었습니다. 순례길은 제게 자신감을 주었거든요. 저는 훨씬 씩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름다웠던 그 길에서 생각보다 괜찮은 저를 만났다고 기억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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