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걸 연애라고 하고 싶지 않아
누구를 욕할 수 있겠어요? 멍청하고 순진한 여자애, 그게 바로 저였습니다.
10대 시절엔 연애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여중, 여고였거든요. 가능성조차 없는 것에 관심을 줄 수가 없으니까요. 아, 초등학교 동창 남자애랑 잠깐 연락한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애와의 결말은 좀 창피합니다. 아버지께서 직접 그 애에게 공부에 전념하라고 전화하셨거든요. 사귀고 자시고도 없었는데!
대학에 가니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새로운 주변 사람들은 연애가 인생 과업인양 굴었습니다. 선배들 중 몇몇이 동기들과 사귀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아이들도 소개팅이니 미팅이니 바빴습니다. 저도 미팅 자리에 따라간 적이 있지만 어색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연애에 흥미를 보이지 않는 이상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물론 제게도 연애에 대한 환상이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많은 콘텐츠를 섭렵했는걸요. 나름대로 형성된 이상적인 로맨스관이 있었습니다.
제가 원하는 연애는 비일상이었습니다. 일상의 교집합이 없는 사람을 우연히 만나길 바랐지요. 그래서 다른 세계를 공유하며 세계관을 확장하는 연애를 꿈꿨습니다. 거기에 여러모로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을 꿈꿨습니다. 공부를 잘하든, 돈이 많든, 세상을 잘 알든, 어느 것이든요! 이왕이면 저보다 나은 사람이길 바랐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로맨스 소설에 나오는 신데렐라 판타지의 하위버전인 셈이지요. 제 현실을 상승시킬 조력자를 원한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런 사람이 왜 저를 좋아하나요? 로맨스 소설 속 여자 주인공은 엄청나게 예쁘거나, 평범하지만 사실 예쁩니다. 게다가 정의롭고 똑똑한 여성들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았어요. 제 판타지는 판타지일 뿐이었습니다.
남자친구가 없는 상태가 지속되자 다들 제가 이상하다고 했습니다. 빨리 연애를 하라고 했죠. 연애를 하지 못하는 것은 이성에게 매력이 없다는 증거라고 했습니다. 이성에게 매력이 없는 것은 한 인간으로서 가치가 떨어지는, 아주 큰일이라고 했지요. 그런 말을 계속 듣다 보니 연애에 대한 의무감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말이죠.
어떤 아이들은 연애의 멋짐을 자주 설파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연애가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특히나 학과 내 CC들은 더욱 별로였습니다. 둘이서 붙어 다니며 지지고 볶다가 바람피우고 헤어지는 걸 지켜보면 징그러웠습니다. 게다가 학교 내에서 연애를 지속하면 그 사람의 연애 경력을 모두가 알게 됩니다. 항상 술자리 안주로 언급되는 사람들은 보며 절대 CC만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던 중 다른 대학에 간 친구가 연애를 시작했습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친했던 아이죠. 그런데 그 애가 연애하게 된 경위가 아무리 들어도 이상했습니다. 동아리 모임에서 만취한 그 애를 한 남자 선배가 챙겨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날 밤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났고, 사귀기로 했대요. 그 사람은 나이도 많고 잘생기지도 않았습니다. 성격도 불안정해서 친구는 자주 울었습니다. 저는 그 애가 겪는 연애의 고충을 많이도 들었습니다. 이러면 안 되지만 저는 가끔씩 속으로 친구를 탓했습니다.
‘네가 순진해서 이상한 남자한테 꼬인 거야!’
대학교 2학년, 스무 살 때였습니다. 예식장 도우미 아르바이트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어요. 조금 피곤했지요. 예식장 도우미는 일당을 바로 받을 수 있어서 좋았지만 신체적으로 피로도가 크거든요. 하루 종일 불편한 유니폼에 머리를 올리고, 미소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속눈썹에는 무거운 마스카라를 얹고, 평소에는 신지 않는 구두로 계속 서 있어야 했죠. 피곤해서인지 퇴근길은 항상 멍했습니다.
주말이라 지하철에는 사람들이 꽤나 있었어요. 앉을자리가 없으니 오직 손잡이에 의지해 기울어지다시피 서있었죠. 그때, 누군가 말을 걸었습니다. 갈색의 곱슬머리와 뿔테 안경이 귀여운 남자였습니다.
지금이야 거리의 무법자인 사이비 포교자들 때문에 낯선 이와의 조우는 누구나 경계합니다. 한때 유행했던 픽업아티스트 어쩌고 때문에도 낯선 남자의 위험성을 대부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저는 이 상황이 그저 신기했습니다. 아무런 접점도 없는 사람이 오로지 느낌이 좋다며 저와의 대화를 원하다니요. 로맨스 같잖아요!
그의 제안으로 지하철 역 근처 카페에서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배가 고파지니 그가 저녁을 사주더군요. 우리는 근사한 식사를 하며 계속 대화했습니다. 꽤 재밌게 오랫동안 대화했지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아요. 잘 들어주는 그에게 제 얘기만 실컷 했던 것 같습니다. 그 사람에 대해 생각나는 건 저보다 10살이 많고, 래미안 아파트를 가지고 있다는 것뿐이네요.
저는 조금 신이 났습니다. 제가 연애를 못하니 매력이 없다는 동기들에게 반박할 거리가 생겼잖아요. 게다가 이 남자는 학교의 어리숙한 남자 동기나 답답한 복학생 선배들과 달랐습니다. 옷도 세련되었고, 제 기분도 잘 맞춰주었어요.
멋진 우연을 뒤로하고 집에 돌아가려 하자 그는 또다시 제안했습니다. 사귀자고요. 저는 수락했습니다. 이 재밌는 사건을 이어가고 싶었으니까요. 이게 얼마나 정신 빠진 짓거리인지 그때의 저는 몰랐습니다.
이틀 후쯤에 그와 데이트를 했습니다. 그는 장미꽃다발을 주었습니다. 저는 신이 나서 꽃다발을 들고 다녔습니다. 그는 재밌게 놀아주더니 또 다른 제의를 했습니다. 사귀게 된 기념으로 주말에 여행을 가자고요. 멀지 않은 펜션에서 가볍게 놀다 오자고 했습니다. 이번 제안에는 조금 망설였습니다. 아직 잘 모르는 사이라서 여행은 어색할 것 같았습니다.
그는 걱정할 것 없다며 저를 안심시켰어요. 편안하게 잠시 다녀오면 된다고 했습니다. 제가 계속 망설이자 사실은 이미 펜션을 예약해서 취소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어쩔 수 없지요. 저는 그 제안도 수락합니다. 그와 손도 잡기 전이었습니다.
여행은 재미없었습니다. 도시 외곽의 숲 속을 하루종일 걸었거든요. 이번에는 저보다 그가 훨씬 많이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 여행에 돈 한 푼도 쓰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려서 그에게 맞춰주었습니다. 그리고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숙소에 들어갔습니다. 이상했습니다. 침대가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는 침대에 앉아 저를 불렀습니다. 아직 무슨 상황인지 잘 몰랐지만 그의 곁에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잠이 오지 않으니 의자에 있겠다고 했습니다. 그제야 그는 솔직한 의도를 말했어요. 사귀게 되었으니 의도를 가지고 여행에 온 거래요.
순식간에 제 뒷목이 경직되었습니다. 그제야 사태 파악이 되었습니다. 그는 갓 스물을 넘긴 어리바리한 애를 어떻게 해보려고 여기까지 데려온 것이었습니다. 저는 떨리는 손을 감추며 단호히 반박했습니다. 편안하게 다녀오는 여행이라고 했지, 이런 의도가 있다고는 말하지 않았잖아요. 저를 속인 거예요?
그래도 그 남자가 아주 나쁜 사람은 아니었나 봅니다. 다행히 제 말에 수긍하고 먼저 잠이 들었어요. 저는 식탁 의자에 앉아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혹시나 하고 챙겨간 닌텐도가 있어서 다행이었어요. 리듬 게임을 몇 시간이나 하면서 아침해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시내까지 저를 데려다주었죠. 홀로 남은 저는 안도감에 주저앉았습니다. 다시는 그와 연락하지 않았어요. 이 모든 것이 일주일 만에 일어났습니다.
이 기억은 너무나 수치스러워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빠르게 진행된 사건이라 동기들과 친구들에게 떠벌리지 않는 것이 천만다행이었지요.
제 꼴이 우스웠습니다. 예전에 연애 때문에 울던 친구가 순진해서 문제라고 했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순진하고 멍청한 여자애는 다른 누구도 아닌 저였습니다. CC를 한심하게 여긴 것도 창피해졌습니다. 그들의 갈등은 서로가 동등한 인격체로 교류했기에 발생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처럼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홀라당 넘어간 거에 비하면 훨씬 건강한 관계였지요.
한 해, 두 해, 시간이 지날수록 그때의 제가 얼마나 멍청했는지를 깊이 느꼈습니다. 특히 세상은 이런 상황에서 무조건 여자 잘못이라고 한다는 것도 알았어요. 남자가 여행 가자는 속 뜻을 모르는 여자는 없다고 하더라고요. 만약 제 이야기를 누군가 알게 된다면, 행실이 바르지 못한 제가 무조건 나쁘다고 할 것입니다.
지금은 그때의 제가 왜 그랬는지 알겠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그 남자를 제 도피처로 생각한 거였어요. 제 낮은 자존감의 도피처요.
저는 친구들의 연애가 부러웠어요. 연애를 하는 친구들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 것 같았죠. 그 애들은 울 때도 있었지만 기뻐할 때가 더 많았으니까요. 소중하게 여겨주는 사람이 생기는 건 좋은 일입니다. 저는 부러워하는 마음을 감추기 위해 그들의 관계에 엄격한 기준을 세웠어요. CC는 이래서 나쁘다, 동갑은 이래서 안 좋다, 너의 연애는 이게 문제다, 다양한 기준들로 그 애들의 연애를 평가절하했죠. 그렇게 제 마음을 지키고 싶었어요.
그래서 제가 평소에 세웠던 기준에 부합하는 남자가 나타나자, 아무 고민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저와 일상이 겹치지 않고, 훨씬 어른스럽고, 돈도 잘 쓰고, 잘 맞춰주는 남자라니! 이런 사람과 연애하면 제가 애써 무시했던 사람들보다 제 가치가 훨씬 올라갈 테니까요.
결국 그런 욕심이 현실의 눈을 가린 것입니다. 제정신이라면 낯선 사람과 사귀자고 할 리가 없는데, 그 생각조차 하지 못했죠. 이상적인 연애를 못하는 상태에서 당장 도망치고 싶으니까,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지도 않았습니다.
사실 연애란 건 선택사항일 뿐입니다. 연애의 여부는 사람의 가치를 증명할 수 없어요. 사람의 가치는 자신이 스스로 증명해야 합니다. 하지만 당시의 제게는 이런 진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제가 스스로 깨우칠 재간도 없었죠.
가끔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어린아이들에게 건강한 관계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알려줄 수 있다면 좋겠다고요. 연애 관계, 자신과의 관계 등 여러 관계에 대해서 어린 시절부터 정확하게 교육을 받는다면 저같이 바보 같은 짓을 하지 않을 테니까요.
만약 연애를 못하는 부담 때문에 그 남자에게로 도망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그날의 지하철에서 멍청한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도, 비슷한 상황이 또 생길 수 있는 노릇입니다. 제가 어떤 상황에서든 그런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바로, 자존감과 경계심입니다.
제가 자존감이 높았다면 사고방식 자체가 달랐을 거예요. 좋은 연인이 제 가치를 증명하는 자격증이 아니란 걸 알았겠죠. 그러니 헛된 욕심으로 이상한 유혹에 휘둘리지도 않았을 거예요.
세상에 대한 경계심도 필요했습니다. 얼마나 험한 세상인데 낯선 사람을 따라가나요.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신원과, 다가오는 목적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진실한 사람인지를 천천히 파악해야 하죠.
이 두 가지만 일찍 알았대도 저는 그를 무시하고, 제 일상으로 돌아갔을 거예요.
그때의 기억을 날조합니다.
스무 살 즈음에 이상한 경험을 했어요. 생긴 건 멀쩡한 남자가 제게 말을 걸더니 사귀자고 하더라고요. 누가 처음 만난 사람이랑 사귀나요? 진짜 이상한 사람에게 걸렸다 싶어서 냅다 도망쳤습니다. 도망이란 이럴 때 쳐야 한다는 걸 여실히 느낀 날이었어요.
스무 살의 저는 단단한 자존감을 바탕으로 최소한의 사리분별은 할 수 있었다고 기억할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