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하게 나의 삶을 고민하지 않은 대가
‘나한테 대줄 돈이 없구나.’ 눈치 빠른 장녀였던 저는 아버지의 속뜻을 간파했습니다.
인터넷에서 한 익명의 글을 보았습니다. 4인 가족 수입이 100만 원인 가난한 학생이 고려대와 경북대에 붙었대요. 하지만 집안 사정 때문에 장학금을 주는 경북대로 진학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작성자는 경북대에 등록하며 울었지만, 꼭 성공해서 가족을 호강시켜 줄 거라고 다짐했습니다. 사람들은 댓글로 익명의 작성자를 응원했지요. 이런 마음가짐이라면 꼭 성공할 거라고.
익명의 작성자가 부러웠습니다. 저는 비슷한 상황에서 원망만 했거든요.
고등학교 때는 집안 사정이 어떻게 굴러갔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대부분 학교에서 시간을 보냈으니까요. 그래도 막연히 경제 형편이 나빠졌다고 느꼈습니다. 꽤나 풍족했던 유년기와는 많은 것이 달라졌으니까요. 집의 크기, 반찬, 용돈의 액수, 부모님의 표정… 모든 것이 달랐습니다.
다행히도 초등학생인 동생은 경제 사정에 대한 개념이 없어서 해맑았습니다. 동생은 학원도 다니고 있었고, 아직 필요한 것이 많지 않아서 우리 집이 어려워졌다는 생각을 못했던 것 같아요. 혹은 그 애가 우리 집이 잘 살았던 시절을 기억하지 못한 덕에 가난을 느끼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저처럼 풍족했던 과거와 현실을 비교할 일이 없었을 테니까요.
어쨌거나 저는 어두워 보이는 집안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저는 그걸 해결할 능력도 없었는걸요. 그 와중에도 제가 고등학교에 잘 다닐 수 있도록 뒷바라지해 주시는 부모님께 감사할 뿐이었죠. 저는 힘드신 부모님께서 저까지 신경 쓰시지 않길 바랐습니다. 실제로도 부모님께서는 제 대학 입시를 생각하실 겨를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진로에 대해 대화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하긴, 부모님이 적극적으로 입시를 알아보는 아이들은 꽤나 잘 사는 것 같더라고요. 아무래도 집에 여유가 있어야 아이들의 미래를 부모님이 챙겨주시는 거겠죠.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습니다. 선생님들은 고3 때 잘해야 인생이 핀다고 하셨습니다. 반 아이들은 1학기부터 수시 지원을 시작했습니다. 부모님과 입시 상담을 하며 갈 수 있는 대학에 최대한 지원했지요.
저는 수시 지원을 하지 않았습니다. 수시 지원은 돈이 들거든요. 제가 수시를 준비한다면 부모님께 부담이 될 거였어요. 그렇다고 수시 원서를 여럿 쓰는 아이들이 부럽지도 않았습니다. 만약에 제게 수시 접수를 하라고 돈을 줘도 저는 어느 대학에 쓸지를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접수를 못할 게 뻔했으니까요.
2학기가 되었습니다. 더 많은 아이들이 수시를 준비했어요. 담임 선생님께서는 두세 명의 아이의 진학만 케어하셨는데, 나중에는 그마저도 손을 떼셨습니다. 선생님의 실수로 한 아이의 수시가 엉망이 된 적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저희 반 아이들은 대부분 부모님께 의지해 입시 전략을 짰습니다.
그래도 한 번은 담임선생님의 임시 상담을 받았습니다. 그날은 담임 선생님께서 반 아이들을 모두 차례로 불러 상담하셨어요. 다른 반도 그렇게 한 걸 보니 학교 내에서 다 같이 시행한 것 같았어요. 안타깝게도 제가 받은 10분가량의 입시 상담은 실망스러웠습니다. 선생님의 권유는 제가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제가 모의고사에 비해 수능을 반토막을 내야 지원할 등급컷의 대학과 전혀 관심 없던 학과를 추천해 주셨거든요.
상담 후 교실로 돌아오자 먼저 상담을 받았던 아이들이 흥분해 있었습니다. 담임 선생님께서는 다른 아이들에게도 모의고사 등급보다 낮은 입학컷의 대학을 추천하셨다고 해요. 한 아이가 우리 반의 진학률을 안전하게 높이기 위해 일부러 낮은 대학을 추천한 것 같다고 했습니다. 선생님께서 1학기 수시 준비 중 실수하신 것도 다시 언급되었습니다. 모두 담임 선생님을 믿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아아들의 생각일 뿐이지만요. 정말 선생님께서 그런 의도셨는지는 알 수 없지요.
슬슬 반 아이들은 제게 어느 대학 가고 싶은지, 어떤 전공을 선택할 것인지, 목표를 정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목표를 정하기 부담스러웠습니다. 대학과 전공의 선택은 선생님들의 말씀처럼 인생을 좌우할 것입니다. 뺑뺑이로 했던 중학교와 고등학교 진학과 달리, 스스로 선택한 진학에는 책임이 따를 것입니다. 더욱이 제게는 입시 상담할 어른도 없었습니다. 혹시나 잘못된 선택을 했을 때, 오롯이 그 책임은 당사자인 제 것이라는 중압감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입시를 고민하는 것에서 회피했습니다. 미래를 직시하는 데에서 도망쳤지요. 제가 선택하고 짊어져야 할 책임이 무서웠으니까요. 저는 모든 고민을 수능 이후로 미뤘습니다. 친구들은 이런 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언젠가는 선택의 때가 올 거라며 웃어 보였습니다.
2학기 수시 접수 기간이 끝나자, 수능 성적만으로 대학에 지원하는 아이들끼리 묘한 유대가 생겼습니다. 최소 등급컷만 맞추면 되는 2학기 수시 합격자들과 달리 이 애들은 수능에서 최대한 고득점을 받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저 역시 정시만을 바라보았지만, 아무 생각 없던 저와는 다르게 그 애들은 전략적으로 정시를 선택한 거였죠. 그 애들은 제게 ‘정시파이터들끼리 힘내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11월의 수능 때까지 치열하게 공부할 각오를 다지는 ‘파이터’였어요.
정시가 마지막 기회라는 ‘정시파이터’들은 목표 대학이 분명했습니다. 목표 등급에 진입하기 위해 부단히 공부했죠. 저는 그 애들이 신기했습니다. 저는 아직도 어느 대학을 가고 싶은지 결정하지 않았거든요. 아, 대학 진학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있긴 합니다. 집 가까이에 있는 지방국립대를 지나가면서 ‘저기만 안 가면 되겠지.’라고 생각했었거든요. 아무래도 좋습니다. 어차피 수능이 끝나면 지원할 대학을 결정해야만 하니까요. 저는 그렇게 미래를 생각하는 것에서 여전히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수능 시험날은 정말 추웠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수능 시험을 다른 학교에 가서 봤는데요, 우연히도 대각선 앞자리에 반 친구가 앉았습니다. 그 애는 2학기 수시에 붙어서 최소 등급컷만 넘기면 되었습니다. 수능을 엄청 잘 볼 필요는 없었죠. 시험장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긴장했는데, 그 애는 홀로 편안해 보였습니다. 그 애는 쉬는 시간마다 다음 과목 준비는 하지 않고 제게 왔습니다. 그리고는 여유로운 미소로 격려해 주었죠. 저는 해맑은 그 애를 보니 맥이 빠졌습니다. 덕분에 긴장하지 않고 수능 시험을 본 것 같아요.
수능이 끝나고 며칠 후에 친구들과 했던 가채점 결과와 똑같은 성적이 나왔습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열심히 공부한 건 아니지만, 마지막 10월 모의고사가 끝나고 바싹 공부한 것이 빛을 발했던 것 같아요. 제가 받았던 모의고사 결과보다 수능 등급이 훨씬 괜찮았습니다. 제 성적은 몇몇 친구들이 원하던 대학에도 지원할만했습니다. 어떤 아이는 제 성적이 얄밉다며 울었어요. 울면서도 제게 축하한다고 말해주어 고마웠습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대학들이 학군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가군, 나군, 다군에 속한 대학들 중 각각 하나의 대학에만 지원할 수 있었어요. 그러니 정시로는 총 3군데의 대학에 지원할 수 있었죠. 반 아이들은 부모님과 학원에서 입시 상담을 받으며 어떤 대학의 어떤 학과를 지원해야 할지를 고민했습니다.
진로 고민에서 도망치기만 했던 제게도 결정의 때가 왔습니다. 제가 지원할 대학과 전공학과를 학군별로 정해야 했죠.
저는 먼저 전공을 생각했습니다. 제가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왠지 전공이 중요할 것 같았습니다. 저는 좋아했던 축구 선수 메시의 언어인 스페인어로 전공을 정했습니다. 가볍게 정한 전공에 친구들은 웃었습니다만, 다른 전공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두 학군에서 스페인어학과에 지원했습니다. 제 성적에 비해 상향인 대학, 평균인 대학으로 지원했죠. 나름대로의 전략적 선택에 뿌듯했습니다. 마지막 한 학군은 하향으로 선택할 셈이었습니다. 인터넷에서 본 정시 지원 전략에는 상향, 평균, 하향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했거든요. 하지만 무슨 자신감인지 제가 하향 지원한 학교에 갈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형식상의 지원인 셈이죠. 저는 입버릇처럼 ‘저기만 안 가면 돼’라고 말한 지역의 국립대에 하향 지원했습니다. 그곳에서 스페인어과가 없어서 대강 무난한 학과를 선택했죠.
결과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상향 지원한 곳은 떨어졌지만 나머지 두 곳에는 합격했으니까요. 하향은 너무 낮췄는지 한 학기 등록금을 장학금으로 받을 정도였습니다. 어쨌거나 저는 평균 지원하여 붙은 대학도 만족스러웠습니다.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대학 생활이 어렴풋이 기대되었습니다.
“도랑아, 잠깐만 와 볼래? 너 전공에 대한 거다.”
저와 대화가 거의 없던 아버지의 부름이었습니다.
“도랑아. 아무래도 스페인어과는 가면 안 될 것 같다. 만약 아빠가 생명이 위급할 때 네가 스페인에 살면, 그곳은 멀어서 아빠가 죽는 것도 못 볼 거야. 그러니 스페인어 전공은 하지 말아라.”
저는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제 아버지지만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요. 극단적인 논리와 예시가 당황스러웠어요. 이럴 거면 스페인어과를 지원하는 저를 진작에 말리지 않으셨던 걸까요? 하지만 눈치 빠른 장녀였던 저는 곧 아버지의 속뜻을 간파했습니다.
‘나한테 대줄 돈이 없구나.’
제가 가고 싶은 대학에 간다면 등록금과 교통비, 혹은 자취비용이 들겠지요. 하지만 스페인어과가 아닌 하향지원한 지거국 대학은 집에서도 통학할 수 있는 위치였습니다. 게다가 장학금으로 등록금 문제도 해결됩니다.
그때까지는 제가 대학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제 성적보다 훨씬 낮은 대학에 가는 것을 상상하자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제 가치가 깎이는 것 같았어요. 그러나 돈을 대주는 것은 부모님입니다. 그러니 부모님의 뜻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우연히 인터넷에서 여자들은 지방거점국립대에 많이 간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가난한 집과 보수적인 집에서는 딸을 먼 대학으로 보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집의 딸은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지방거점국립대에 장학금을 받으며 입학한다고 했죠. 그 글의 지거국으로 수렴된 똑똑한 딸들의 사례가 적힌 댓글이 잔뜩 달렸습니다. 사람들은 저 같은 삶을 사는 여자애들을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 삶은 안타까운 삶이었습니다.
저는 댓글 속의 딸들처럼 지거국에 입학합니다. 그 이후는 시시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원망 때문인지 대학교에 적응하지 못했고, 학교를 엉망으로 다녔습니다. 장학금도 이어지지 못했죠.
종종 아버지와의 대화를 떠올렸습니다. 그때 좋은 대학에 보내달라고 떼를 썼다면 어땠을까요? 대출이라도 받아서 보내달라고요. 하지만 상상일 뿐입니다. 저는 그 순간으로 돌아가도 아버지께 반박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3년 내내 진로에 대한 고민에서 도망쳤는걸요. 스페인어라는 선택도 가볍게 결정한 거였고요. 그런 제게는 어려운 집안 사정에도 불구하고 지원을 부탁드릴 명분이 없었습니다.
몇 년 후 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의 말처럼 제가 근처에 살았기 때문에 임종을 지킬 수 있었죠. 사람이 죽으면 꽤나 복잡할 절차들이 많습니다. 바쁜 일들을 한참 정리하고, 어머니와 한 시름 놓았다며 쉬던 때였습니다. 문득 그날의 대화가 생각나서 어머니께 말했습니다.
“엄마. 아빠가 스페인어과 가면 아빠 죽을 때 못 본다고 했잖아. 내가 그 대학 안 간 덕분에 아빠 가시는 걸 본 거 아닐까?”
농담처럼 한 말이었는데, 어머니는 펄쩍 뛰셨습니다.
“내가 그때 생각하면 얼마나 속상한 줄 알아? 애한테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지!”
저는 아버지의 그 제안이 어머니와 합의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어머니는 제 대학 진학에 대해 어떻게든 지원해 주자는 입장이셨고, 아버지의 결정에 아직도 속상하다고 하셨습니다.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그 당시 어머니는 제게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았나 봅니다.
저는 어머니의 따뜻한 등에 기댔습니다. 어찌 되었든 이젠 먼 과거의 일이고, 우리는 현재를 살아야 하니까요.
만약 제가 진로 고민에서 도망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제가 마음을 굳게 먹고, 진로를 진작부터 고민했으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전공을 정하기 위해 제가 어떤 것에 흥미 있는지를 찾았겠죠. 만약 대학을 우선시했다면 좋은 대학이지만 입결이 낮은 학과를 찾았을 거예요. 충분히 고민했다면 수능을 보고 난 후의 짧은 시간 동안 결정했던 지원서보다 더 상향된 지원서를 작성할 수 있었겠죠. 내신도 나쁘지 않았으니 수시에 도전할 수도 있었어요. 수시 지원비용이 싸진 않았지만 한 군데도 지원을 못할 정도로 집이 어렵지는 않았으니까요.
부모님과도 진로에 대해 꾸준히 이야기했다면 좋았을 거예요. 대학을 왜 가고 싶은지, 어떤 이유로 공부를 하는지를요. 그리고 지금 생각에는, 부모님께서는 제 모의고사 성적이 얼마나 높은지 전혀 감이 없으셨던 것 같아요. 그걸 미리 알려드렸다면 제 진로를 함께 고민하며 대학을 보낼 경비를 천천히 준비하셨을 수도 있지요. 물론 형편상 제 대학 지원이 어렵다고 하실 수도 있어요. 여전히 제게는 가까운 국립대가 최선이라고 하실 수도 있죠. 그래도 그걸 미리 알았다면 더 좋은 학과를 고려했을 거예요.
그리고 이렇게 깊이 생각하고 진학한 대학이라면, 어디로 가든지 열심히 공부했을 것 같습니다. 등 떠밀려서 온 것처럼 우울하게 있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때의 기억을 날조합니다.
고등학교 때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대학이었습니다. 어느 대학의 무슨 과를 가면 좋을지, 갈 수는 있을지 부모님과 자주 상의하였지요. 결과적으로 가게 된 대학은 무척 좋은 곳은 아니었지만, 제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선택이었기에 만족스러웠습니다. 이 선택을 위해서 3년간 고민했으니 후회도 없었고요. 부모님도 제 대학 생활을 많이 응원해 주셨답니다.
저는 진로 문제를 직시했고, 제 선택에 만족했던 걸로 기억할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