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시절 단짝 이야기
내면의 감정과 반대로 행동하는 제 모습이 ‘반동 형성’이라는 방어기제라는 걸, 나중에야 오은영 선생님의 프로그램을 보며 알게 되었죠.
거절 못하는 성격은 왜 형성되는 걸까요? 주로 ‘착한 아이 증후군’이 있는 사람들이 거절을 잘 못한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의 저도 이 병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에게 거절을 못한 것이 아닙니다. 이 병은 단 한 명을 대상을 발병했습니다.
그 대상은 고등학교 3년간 단짝이었던 아이입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일주일도 안되었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저는 낯선 아이들 틈에서 쪼그라져 있었지요.
그런데 짝이 된 아이가 불쑥 제게 말을 걸었습니다.
“너 이름이 뭐야?”
당당한 저음의 목소리가 예쁜 아이였습니다. 그 애는 저의 뭐가 마음에 들었는지 자기의 친구들과 점심을 먹자고 제안했습니다.
그 애와 학교식당에 가니 입구에서 그 애의 다른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모두 다른 반 아이들이었습니다. 다들 같은 중학교 출신이었는데, 제게 점심을 제안했던 그 애만 다른 반으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친구들과 떨어진 상황이 비슷했던 그 애와 저는 점점 가까워졌습니다. 물론 제 친구들은 아예 다른 학교에 있었지만요.
저는 학교에서 많이 잤지만, 식사시간과 하교시간은 깨어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깨어있는 시간들을 모두 ‘그 애’와 보냈습니다. 그 애는 저를 살뜰하게 챙겼고, 그 애의 친구들도 저를 보면 인사해 주었습니다. 저는 조금 안심했습니다. 친구를 사귀지 못할까 봐 걱정했는데, 그 애가 먼저 다가와줬으니까요. 이제 다른 아이들에게 어색함을 무릅쓰고 친해지려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얼마나 다행인가요.
우리가 친해지자 그 애는 점점 여러 가지를 부탁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게 야자가 끝나면 집에 데려다 달라고 했습니다. 그 애의 집은 걸어서 15분 정도 걸립니다. 저는 다시 학교로 돌아와서 버스를 타야 했죠. 그 때문에 하교 시간이 30분이 늦어져도 저는 수락했습니다. 그 애는 고마운 아이니까요. 그 애가 토요일 자율학습 후 집에 놀러 오라고 했을 때도 수락했습니다. 그 애의 집은 차갑고 어두웠지만, 그 애의 아버지는 항상 다정하게 라면을 끓여주셨습니다. 주말에 도서관에 가자는 부탁도 수락했습니다. 맨날 자는 저는 그때 아니면 언제 공부했을까요. 제게도 좋은 일이었습니다. 물론 내심 그 애의 부탁이 귀찮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소중한 그 애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그 애는 제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 연예인, 케이블 티비 프로그램을 알려주었고,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도 많이 들려주었습니다. 가고 싶은 대학이나 장래희망 같은, 자신의 꿈에 대해서도 자주 말했습니다.
저도 제가 좋아하는 걸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무한도전을 좋아한다고 하니 그 애는 바보들이나 보는 방송이라며 정색했습니다. 자기 친구가 한심한 걸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똑똑한 그 애에게는 그렇게 보였나 봅니다. 저는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당황해서 웃어넘겼습니다.
그 애는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저는 제 얘기를 점점 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있으면 그 애가 말할 때가 훨씬 많았죠. 점점 우리 사이의 많은 것을 그 애가 주도하고 결정했습니다.
우리 관계가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1학년이 끝나갈 무렵이었습니다. 너무 늦었지요. 다른 친구로 갈아타자니, 친구를 사귈 타이밍은 다 놓쳤습니다. 이미 아이들은 저마다의 무리를 형성했습니다. 이제 와서 다른 무리에 끼어드는 것은 자존심 상하고 곤혹스러운 일입니다. 그렇다고 그 애와 관계의 개선을 위해 이야기해 보는 건 더욱 상상도 못 할 일이었습니다. 그 애는 성격이 강했고, 속상할 때는 주먹에 피가 날 때까지 벽을 내려치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 애에게 관계 조율을 하자고 하면, 제게 그동안 억지로 친한 척했냐며 화를 낼게 뻔했습니다.
결국 그 애와 멀어지고 싶다는 제 마음을 모른 척하기로 했습니다. 제 감정에서 도망치기로 한 거였죠. 왜냐하면 그 애와 부딪히는 게 싫었으니까요. 계속 그 애의 부탁을 들어줬고, 그 애를 집으로 데려다주었습니다. 그 애의 투정과 짜증도 성실히 받아주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보지 않을 테니, 일단은 견디기로 했습니다.
2학년이 되었습니다. 그 애와 반이 떨어졌지만 같이 지내는 시간에 큰 차이는 없었습니다. 저는 점점 그 애와 더 이상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 말과 행동은 그 애에게 모두 맞춰주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그 애를 피하고 싶었는데도 저는 적극적으로 그 애에게 호응했습니다. 이것이 내면의 감정과 반대로 행동하는 ‘반동 형성’이라는 방어기제라는 걸, 나중에야 오은영 선생님의 프로그램을 보며 알게 됩니다.
우리의 관계가 바뀐 것은 3학년 때부터였습니다. 그 애와 같은 반은 되었지만, 그 애는 미대 입시 준비 때문에 야자를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제 더 이상 그 애를 집에 데려다주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 애가 없어지자 그 애의 친구들도 굳이 저를 찾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 빈자리에 다른 친구들이 조금씩 다가왔습니다.
제게 다가와준 아이들이 신기하고 고마웠습니다. 이미 친구들도 다 있는 애들이 왜 제게 다가오는지 이유는 몰랐지만요. 이 애들은 제게 여러 가지를 질문했습니다. 제가 왜 많이 자는지, 오늘 급식은 맛있었는지, 문학 선생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습니다. 저는 놀랐습니다. 이 애들은 제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를 물었거든요. 단짝도 궁금해하지 않는 저를 궁금해했다고요!
6월이 되자 월드컵이 시작했습니다. 저는 월드컵이 너무나 흥미로웠지만 단짝인 그 애는 월드컵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 애에게는 자신의 입시 준비가 더 큰일이었죠. 저는 점심시간마다 월드컵 이야기는 감추고 그 애의 입시 이야기를 성실하게 들었습니다.
대신에 그 애가 없는 저녁시간과 야자시간에는 다른 친구들과 월드컵 얘기를 했어요. 대한민국의 16강이 달린 스위스 전이 열릴 때, 저와 새 친구들은 경기장에서 스크린을 보며 응원했어요. 우리는 목이 터져라 응원했지만 결과는 아쉬웠습니다. 우리들은 침울하고 꼬질하게 학교로 돌아갔습니다. 아침에는 토요 자율학습이 있었거든요. 그 애는 저에게 한심하다고 했어요. 저는 그 애의 말에 수긍했습니다. 그 애의 말을 거슬러서 화가 나게 만들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어쨌거나 저는 그 즈음부터 다른 아이들과 꽤나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새로 사귄 친구들은 장난을 좋아했습니다. 동물 모양의 필통들을 모아 벽에 붙여놓고 동물농장이라고 불렀습니다. 낙엽만 굴러가도 웃음이 나는 시절에는 그게 너무 웃겼습니다. 또, 수업시간에는 돌아가며 전자사전에 교환일기를 적었습니다. 어떤 아이는 삐뚤한 그림으로 연예인과 선생님이 결혼하는 만화를 그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다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렇게 웃기는 아이들 덕분에 저는 학교에서 졸지 않고 깨어있는 시간이 늘어났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우리는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저는 대학을 진학했고, 그 애는 재수를 했습니다. 저는 바쁘다는 핑계로 그 애와의 연락을 서서히 줄였습니다. 다음 해에는 그 애도 대학을 갔습니다. 가끔 만나는 그 애는 여전히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특히 그 애의 연애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제가 아는 그 애는 항상 자기주장이 뚜렷한 사람이었는데 연애할 때는 남자들에게 많이도 상처받고 휘둘렸습니다. 그 차이가 참 신기했습니다.
어느 해인가 제게 굉장히 힘든 시기가 왔습니다. 여고시절 월드컵을 같이 보던 친구들이 저를 챙겨주었습니다. 그 친구들이 무척 큰 힘이 되어주었지요. 하지만 단짝이었던 그 애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다른 아이를 통해 다시는 저를 보지 않겠다고 전하더군요. 그 애는 제 상태를 감당할 수 없다고 했대요. 제 생각에는 그 애가 수년간 연락을 자주 피했던 저에게 섭섭함이 쌓여서 그런 결정을 했을 것 같아요.
어쨌거나 우리 관계의 시작처럼, 끝맺음도 그 애가 해준 셈입니다. 저는 이제 그 애를 보지 않는 것에 안도했습니다. 그리고 수동적인 제 자신이 치사하게 느껴져서 조금 울었습니다.
저는 꽤 오랫동안 이 도망을 자책했습니다. 20대에는 그 애에 대한 원망과 죄책감이 종종 떠올랐죠. 그 애와 대화할 용기가 없어서 불만을 숨긴 채, 자존심도 없이 맞춰주었던 저의 회피는 회상할수록 자존감이 깎이는 지질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30대가 되고 보니, 우리 둘 다 어린애였을 뿐입니다. 그 애 입장에서는 자신을 잘 받아주는 친구가 생겨서 좋았고, 좋은 친구랑 자주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 뿐이었을 거예요. 저도 처음엔 저를 좋아해 주는 아이를 속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잘 맞춰줬던 거고요. 하지만 어린애였기 때문에 관계의 균형을 잡는 법을 몰랐습니다. 둘 중 한 명이라도 그걸 알고 더 건강한 관계를 만들어갔으면 좋으련만,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에게는 그런 심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어쨌거나 그 애 때문에 힘들었던 만큼, 진심으로 그 애가 고맙고 좋았던 순간도 참 많습니다. 언제나 씩씩했던 그 애가 제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그 애가 주는 불편함에서 도망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만약 제가 조금 더 용기와 줏대가 있어서 그 애에게 제 의사를 말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 애를 집에 데려다 주기 피곤하다고, 내가 좋아하는 것에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너 말고 다른 아이들과도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이런 제 생각을 말할 수 있었다면 우리 관계는 달라졌을 거예요.
물론 그 애에게 제 목소리를 냈다면, 그 애는 화를 낼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의외로 잘 들어주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애는 저를 좋아하긴 했으니까요. 그런 과정을 거쳤다면 우리는 서로의 건강한 인격형성에 도움이 되었을 거예요. 저는 좋아하는 사람의 부탁을 거절하는 법을 배웠을 거고, 서로의 의견이 다를 때 조율하는 법을 익힐 수 있었을 거예요. 그 애는 어떨까요. 거절당하는 것이 굳이 화낼 일이 아니란 걸 배울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랬다면 우리는 조금 더 성숙하게 10대를 마무리했을 것이고, 우리의 20대는 조금 덜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그때의 기억을 날조합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멋있는 단짝이 있었습니다. 자기 의견이 확실하고 성격도 불같지만, 저를 많이 챙겨주던 아이예요. 우리는 성격도, 생각도 달라서 항상 의견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울고불고하면서도 어떻게든 서로를 이해했죠. 우리는 힘들었던 고등학교 3년간 서로의 힘이 되어주었어요. 지금은 자연스레 연락이 끊겼지만, 우리의 어렸던 추억은 항상 남아있을 거예요.
저는 이제 그 애와 좋았던 순간만 기억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