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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랑 Oct 09. 2023

싱글벙글 오타쿠 라이프

현실도피형 오타쿠의 탄생

오타쿠는 꽤나 즐거운 라이프 스타일이에요. 제가 그 좋은 걸 현실도피로 이용했을 뿐이죠.


제가 중학교를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설적인 보이그룹 H.O.T.가 해체했습니다. 아무래도 학교가 여중이라 H.O.T. 팬들이 많았어요. 반 애들 절반이 쉬는 시간마다 울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울지 않았습니다. 남의 일이었거든요. 뮤직뱅크를 재밌게 보긴 하지만 울 정도로 연예인이 좋진 않았어요. 제가 좋아했던 건 만화였으니까요.


그러던 중 반 아이 하나가 엄청난 신문물을 가지고 옵니다. CD에 담긴 일본 애니메이션이었어요! 오빠가 있던 그 애는 선진 문물에 밝았습니다. 그 애 덕분에 우리들은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는 방법부터 성우들이 부르는 캐릭터송이 있다는 것, 윈엠프라는 프로그램으로 애니메이션 라디오를 듣는 방법까지!


더구나 인터넷 문화가 활발해지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하나의 애니메이션을 인터넷에 검색하면, 그와 관련된 콘텐츠가 무수히 쏟아졌습니다. 팬아트, 팬픽, 코스프레 등 2차 창작도 무궁무진했죠. 저는 마음 맞는 친구들과 밤을 새워 애니메이션 콘텐츠를 탐구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죠.


“어? 나 오타쿠네?”




당시는 오타쿠라는 단어가 대중화되기 전입니다. 그래서 반 아이들은 저와 친구들을 ‘만화 좋아하는 애들’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당사자인 저희는 우리의 정체성이 오타쿠라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았습니다. 특별한 명칭이 조금 자랑스럽기도 했고요.

오타쿠 생활은 무척 바쁩니다. 많은 콘텐츠를 소비해야 했고, 그것을 심도 깊게 이해하고 토의해야 했으며, 때로는 2차 창작까지 만들어야 합니다. 다른 아이들처럼 연예인을 좋아하거나 외모를 꾸미는 데 신경 쓸 틈이 없었습니다. 절로 오타쿠 아이들은 오타쿠들끼리 교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오타쿠들이 모두 같은 것을 같은 형태로 좋아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각자의 취향이 있었고, 콘텐츠를 향유하는 방법도 다양했습니다. 어떤 아이는 윈엠프로 애니메이션 노래를 불러 사람들과 공유했습니다. 어떤 아이는 일본어를 공부했습니다. 어떤 아이는 팬아트를 그렸지요.


저는 친구를 따라서 노래를 불러봤습니다. 하지만 노래는 어렵더군요. 대신에 많이 들었습니다. 일본어 공부하는 걸 따라 해 본 적도 있습니다. 한자가 너무 많았어요. 특별활동을 일본어반으로 들어가는 걸로 만족했습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친구를 따라 해 보았습니다. 그 친구는 미술학원을 다니고 있어서 정말 잘 그렸어요. 기가 죽어서 조금씩만 그렸습니다. 친구들을 따라 해 보며 제가 생산하는 타입의 오타쿠가 아닌 걸 알았습니다. 저는 새로운 정보를 계속 소비하는 타입의 오타쿠였어요.




그즈음 집안 사정이 나빠졌습니다. 가족 관계도 좋지 않았죠.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막내 고모와 살기로 하셨습니다. 부모님과 저와 동생, 우리 네 식구는 조금 작은 집으로 이사 갔습니다.


집에 늘 계시던 아버지는 어린 동생에겐 정말 다정하셨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말을 걸지 않으셨어요. 인생에서 정말 힘든 순간에는,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아이에게만 겨우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학생인 저는 그걸 몰랐습니다. 아버지께서 그렇게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단 것을 저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싫어했죠.(아빠 미안)


가장이 된 어머니는 일이 바빠 늦게 오실 때가 많았습니다. 냉장고의 반찬을 꺼내 저녁식사를 준비하라고 제게 신신당부하셨지요. 하루종일 집에 있는 아버지가 해줘도 되는 것 아닌가요? 저는 항상 투덜거리며 저녁을 차렸습니다. 그 기억 때문인지 아직도 부엌일을 어려워한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여전히 제 방을 가지고 있었다는 거예요. 저는 방에 틀어박혀 현실에서 도망쳤습니다. 만화와 라이트노벨을 읽고, 애니메이션을 봤습니다. 게임을 하고, 관련 자료들을 찾습니다. 거기에 인터넷에 올라온 2차 창작물까지 끊임없이 찾아봤습니다. 몰입과 집중은 다른 일들을 잊게 해 줍니다. 매일 저녁부터 밤까지 학교의 오타쿠 친구들조차 모르는 정보들을 찾았습니다. 학교가 일찍 끝나는 토요일부터 일요일까지는 거의 방에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이런 제가 많이 답답하셨는지 혼도 많이 내셨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때려서 말을 듣게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습니다. 중학생은 아주 제멋대로인 존재니까요.




오타쿠의 세상은 참 깊었습니다. 만화 하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를 위한 지식이 많이도 필요했습니다. 중국의 고대문학을 배경으로 한 만화를 이해하기 위해 그것을 공부했습니다. 스포츠 만화를 이해하기 위해 스포츠의 규칙을 공부했습니다. 판타지 세계관 역시 아무것도 없는 공상의 세계가 아니었습니다. 원안이 되는 세계관이 있었고, 그 속에서 사는 인간의 체제 역시 모델이 따로 있었습니다. 저는 수많은 정보를 계속 탐닉했습니다.

그 많은 정보들이 모두 기억에 남지는 않았습니다. 외우기 위한 정보가 아니었으니까요. 그저 정보에 몰입하는 동안 현실을 잊을 수 있다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만화 속의 대서사시에 비하면, 초라한 제 삶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부모님께 90점짜리 성적으로 혼나서 우는 것보다, 숭고한 희생으로 세계를 구원한 캐릭터에게 눈물을 흘리는 것이 훨씬 나았습니다.


친구들과의 대화 주제도 제 자신에 대한 얘기보다는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콘텐츠에 대한 것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저는 제 얘기를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많은 정보를 준비했습니다. 친구들에 제 현실에 대해 물어볼 틈을 주지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 저조차도 제 자신과 대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도피형 오타쿠의 삶은 대학 진학과 동시에 막을 내립니다. 20대에 들이닥친 현실은 모르는 척 하기엔 너무나 크고 아팠어요. 도저히 오타쿠 놀이로 도망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거든요. 하지만 정말 재미있는 작품이 나타났을 때는 잠시 오타쿠의 삶을 즐기기도 했습니다. 사실 건전한 오타쿠는 꽤나 재밌는 라이프 스타일이거든요. 


이제 와서 돌아보니, 과하게 빠져있던 것이 조금 아쉽습니다. 분명 만화 속에 빠졌던 시간은 재밌었어요. 그러니까 몰입을 했겠지요. 대신 현실의 사람을 배울 시간을 잃었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와 대화해 볼 시간을, 동생을 살필 시간을, 친구들의 생일을 물어볼 시간을 잃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를 돌아보는 법을 그때 배우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제가 만화로 도망치기보다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조금 더 관심과 사랑을 줄 수 있는 아이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결국 저를 지켜준 것은 만화가 아니라 사람들이었어요. 그때의 만화 속 인물들은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아요. 지금까지 저를 지탱해 준 것은 현실의 사람들입니다. 




제가 지나치게 만화에 빠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만화에 빠지지 않았다면 분명 괴로웠을 거예요. 현실이 힘들었으니까요. 엇나갈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현실을 바꿔보려는 시도를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무기력해진 아버지께 손편지라도 써보지 않았을까요? 바빠진 어머니에게 응원의 문자라도 보내지 않았을까요? 친구들이 어떤 성격인지, 꿈은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았을까요?


만약 그랬다면 제 현실은 달랐을 것입니다. 물론 갑자기 경제 형편이 나아지거나, 아버지의 성격이 좋아지거나, 함께 노는 아이들이 바뀌지는 않았겠죠. 그래도 우리는 조금 더 대화할 수 있었을 거예요. 서로를 더 이해할 수 있었을 거예요. 누군가를 이해하는 만큼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고 하죠. 저는 조금 더 사랑하는 현실에서 살아갈 수 있었을 거예요.


그때의 기억을 날조합니다.


저는 중학교 때 만화와 애니메이션 등 서브 컬처에 푹 빠졌습니다. 무한히 뻗어나간 상상의 나래를 주변 사람들과 나누었지요. 가족들은 저를 엉뚱하다고 생각했지만 친구들은 함께 만화책을 보며 좋아해 주었습니다.


만화로 물꼬를 튼 대화는 서로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시절의 저는 다양한 주제로 사람들과 대화하며 그들을 이해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만화는 제가 주변 사람들과 풍성한 교류를 하게 해 준 고마운 매개체였습니다.



저는 만화만큼이나 주변 사람들을 좋아하는 귀여운 아기 오타쿠였다고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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