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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랑 Oct 13. 2023

엉망진창 대학생

노력 없이 불평불만에 머문 결과

이미 현실은 최악이었습니다. 어디서부터 고쳐나가야 할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든 노력하는 사람은 현실을 바꾸어 냅니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성공한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증명합니다. 나쁘지 않은 환경에서 불평하고 회피하는 사람도 현실을 바꾸어 냅니다. 상황을 악화시키거든요. 이것은 제가 증명할 수 있습니다. 저는 대학 생활을 엄청나게 나쁘게 만들었거든요.




진학한 대학교는 지리적 관점에서는 새롭지 않았습니다. 집과 무척 가까워서 늘 보던 곳이었거든요. 뻔한 등굣길에 시무룩했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대학에는 새로운 것들이 많았습니다. 더 이상 ‘같은 반 친구’는 없었고, ‘동기’와 ‘선배’라는 관계가 있었습니다. 교복이 아니라 매일 고민해서 사복을 입어야 했고요. 시간표도 스스로 짜야했습니다. 수업이 끝난 후에는 동기들과 술을 마셨습니다. 저는 술을 배우며 이걸 좋아하진 않는다는 것도 알았어요. 그래도 술자리에는 종종 참여했습니다.


새로운 것들 중에서 도무지 좋아지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전공과 선배들이었습니다.


어문계열이었던 전공은 도무지 공부할 의욕이 나지 않았습니다. 이미 원어민처럼 구사하는 동기들이 많았거든요. 이전까지 조금만 공부해도 성적이 상위권이었던 제게 충격적인 환경이었습니다. 게다가 대학은 상대평가입니다. 원어민 같은 동기들이 있는 한, 아무리 공부해도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선배들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여자 선배들은 장기자랑을 강요했고, 우리의 얼굴에 담배연기를 뱉었습니다. 한참 나이 많은 남자 선배들은 여자 동기들에게 치근덕거렸습니다. 선배들이 죄다 이상한 사람밖에 없었네요. 나중에야 건실한 선배들은 군기를 잡지도 않을뿐더러, 학업에 바빠서 잘 보이지 않았다는 걸 알았지만요.


정말이지 학교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반수나 편입은 생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어차피 집에서 보내줄 수 있는 대학은 여기뿐이었으니까요. 그렇다고 이런 제 고민을 누군가에게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집안 환경이 어렵다고 자랑하고 싶지도 않았고, 제 수능 등급 얘기는 누군가에겐 잘난 척이겠지요. 저는 최대한 고민 없이 밝은 척하며 지냈습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불만이 부글거렸지요.




저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부모님께 부담을 드리고 싶지 않았거든요. 핸드폰 요금부터 용돈까지 제가 벌어서 쓰기 시작했습니다. 빵집, PC방, 키즈카페, 야구장, 백화점, 공장 등 여러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아르바이트는 상대평가가 아니었습니다. 시급에 따라 정확한 성과를 얻었죠. 그래서 저는 아르바이트가 꽤 재밌었어요. 감사하게도 사장님들이 많이 예뻐해 주셨고요.

그 대신 학업은 뒷전이 되었습니다. 전공 수업에는 지각하기 일쑤였고, 공부를 하지 않아 진도를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과제를 내지 않은 적도 많습니다. 시험 결과는 당연히 엉망이었고요. 저는 장학금을 유지할 수 있는 성적에서 미달되었습니다.


부모님께 정말 부담을 드리고 싶지 않았다면 아르바이트보다는 학업에 전념하는 것이 더 좋았겠죠. 하지만 그때의 저는 그 생각을 하지 못했어요. 학업에 대한 도피로 아르바이트에 충실했던 것 같기도 하고요.




국가장학재단에서 학자금을 대출받았습니다. 제 이름으로 만든 첫 번째 빚이었습니다. 학비를 제가 책임져야 하는 사실이 실감 났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저도 다른 아이들처럼 부모님이 학비를 대주셨으면 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은 돈을 아끼셔야 했습니다. 아직 어린 남동생도 지원하셔야 했으니까요.


현실에 대한 불만이 쌓일수록 저는 학업에 점점 더 소홀해졌습니다. 어느 날부터는 이렇게 합리화까지 했지요.


‘내 돈으로 등록해서 내가 수업 안 나가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그 생각은 실제로도 맞았습니다. 제게 정신 차리라고 하는 사람은 딱히 없었어요. 저는 계속 학업을 소홀히 하고, 아르바이트를 한 돈으로 놀았습니다. 고등학생과 달리 대학생은 돈만 있으면 마음껏 놀 수 있습니다. 저는 공연에 가는 걸 좋아했어요. 아르바이트한 돈이 담긴 체크카드를 들고 새벽까지 클럽에서 공연을 즐겼습니다. 아침해가 뜨면 첫차를 타고 집에 돌아왔지요.


아침에 들어가면 부모님께서 많이 혼내셨습니다. 외박이나 마찬가지라면서요. 저는 외박을 하면 안 되는 이유를 여쭤보았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여자애가 함부로 밖에 있으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이해할 수 없는 답변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예 집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학교나 자취하는 친구집에서 버틸 수 있었거든요. 외박에 대해 간섭하지 않겠다는 부모님의 약속을 받아 내고서야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이렇게 제멋대로 살았는데도 여전히 불만이 많았습니다. 제가 이 학교 학생이란 것도 싫었고, 이런 학교에서 성적관리를 못하는 것도 싫었습니다. 매일 옷을 신경 쓰는 것도 귀찮았습니다. 하지만 옷을 못 입는다거나 맨날 같은 옷을 입는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열심히 돈을 벌어 옷을 샀습니다. 가볍게 노는 동기들과는 패밀리 레스토랑이나 클럽에 자주 갔습니다. 거기서 돈을 펑펑 쓰며 가난하지 않은 척을 했습니다.


동기들은 이런 제게 공부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고맙다고 했습니다. 대학 성적은 상대평가이기에 제가 밑에서 깔아주어 고맙다고요. 그 감사는 진심이었겠죠.




하지만 대학교에도 좋았던 것은 있습니다. 저는 교양 수업들을 좋아했어요. 서양사, 미학, 자본주의, 사회학, 여성학 등 흥미로운 교양 과목은 제가 학문의 요람에 왔다는 실감을 주었습니다.


세계사에서는 마케도니아의 왕이 헬레니즘 제국을 세운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여성학 시간에는 죽어간 여자들에 눈물짓다가도 혼란스러운 현대 여성운동 계보에 머리가 아팠습니다. 자본주의 수업에 갔더니 마르크스주의가 나와서 당황하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고등학교 때 단어로만 외웠던 사상이 태어나고 스러지는 과정을 배웠죠. 미학 교수님께서 흥분하신 일도 인상적이었어요. 2시간 내내 청계천의 조형물이 미술과 정치의 불협화음으로 탄생한 거대고동이라며 비판하셨지요. 사회학 시간에는 처음으로 MBTI를 배웠습니다. 한 번은 유형별로 학생들을 분류했는데 성격이 제각각이라 너무 신기했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MBTI가 대중화되기 전이라 엄청나게 신선했어요!

교양 시간에 배웠던 새로운 지식에 대해서 열거하자면 끝도 없겠죠. 당연히 교양은 성적이 잘 나왔습니다. 제게 있는 쥐꼬리 같은 학점은 모두 교양 과목 덕분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지식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으로 수업에 참여한 것은 아니에요. 솔직히 지적허영심 때문에 수강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를 학교에 붙들어 주는 것은 얄팍한 허영심뿐이었습니다.




슬슬 취업을 위해 대외활동을 준비하는 동기들이 생겼습니다. 그 당시 대기업 취업을 위해서는 높은 학점과 다양한 대외활동, 어학점수가 필요했습니다. 저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준비된 것이 없었지요. 사회에서 요구하는 스펙에 비하면 저는 몹시 초라했습니다. 그때쯤 제가 정상이 아니란 걸 자각했습니다.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인생을 이렇게까지 망칠 수는 없었습니다.


학교 내의 상담센터를 찾았습니다. 현실을 풀어갈 실마리를 기대하면서요. 그런데 예상과 달리 상담 선생님은 죽음을 경험한 적이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선생님과의 대화 끝에 저는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를 떠올렸고 그 순간이 생각나 많이 울었습니다. 그러나 10년 전쯤에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대학 생활과는 별 상관이 없었나 봅니다. 제가 달라지는 건 없었습니다.


어머니께 제 상태를 말씀드렸습니다. ‘엄마, 나 너무 이상해. 아무래도 우울증인 것 같아.’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제가 정신만 차리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때는 정신의학에 대한 인식이 지금과는 달랐습니다. 더구나 정신병과 연관되면 인생을 망치는 주홍글씨가 찍힌다고 생각했지요.


악화된 현실은 최악이었습니다. 어디서부터 고쳐야 할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어요.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제 선택의 결과라며 강한 척을 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망가진 상태로 계속 시간을 보냈습니다. 현실을 바로잡는 데에서 도망친 것입니다.




만일 현실에서 도망가지 않고
대학 생활에 충실했다면 어땠을까요?


아, 이런 가정은 제게 너무 가혹합니다. 암흑 같던 그때를 반추하는 것이 괴롭습니다. 그럼에도 이 기억은 반드시 날조해야 합니다. 그래야 제게 미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전공을 공부해야 했습니다. 공부한 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더라도요! 어떻게든 성적을 맞추면 장학금이 계속 나왔겠지요. 학점이 받쳐준다면 전공을 바꾸는 전과도 고려해 볼 수 있었을 거예요.


그것도 아니라면 자퇴하는 방법도 있었을 거예요. 차라리 자퇴를 해서 새로운 사회를 접하고 성장하는 방법도 있었겠지요. 사회에는 고졸이라도 충분히 건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일하는 것도 좋아했고요. 이렇게 학교를 다닐 바에는 다른 길을 모색하는 것이 더 나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느끼는 현실을 주변에 빨리 밝혔어야 했습니다. 부모님께든 누구에게든 제 상황을 밝히고 도움을 구해야 했습니다. 괜찮은 척, 멀쩡한 척하는 게 아니라요! 부끄러운 제 모습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20대의 시간과 돈이 헛되게 낭비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 거예요.


이 모든 것의 근원적 원인은 ‘불만’이었습니다. 현실이 불만스러웠기에 도망친 거니까요. 하지만 제 현실은 어떤 사람에게는 감사한 현실이었습니다.


제게는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이 학교도 겨우 입학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편입까지 해서 들어온 사람도 있었어요. 그리고 전공 수업이 공부한 만큼 성과를 내기 어렵대도, 성실히 학점을 따고 좋은 회사에 취업한 동기들도 충분히 있었습니다. 애초에 세상에는 대학에 진학하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저는 그 사람들보다 훨씬 혜택을 받은 위치였죠.


저는 제 현실에 대한 감사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불만을 가졌고, 그래서 도망쳤습니다.



그때의 기억을 날조합니다.


대학 생활은 힘들었습니다. 전공도 맞지 않았고, 마음을 붙일 것도 없었습니다. 저는 주변에 도움을 구했습니다. 여러 사람들에게 상담을 하면서 제 현실도 충분히 감사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노력하면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배웠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 대학 시절을 보냈습니다. 만약 대학 생활이 학점과 취업으로 요약된다면 훌륭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포기할 뻔한 제게는 충분한 성취였습니다.



현실에 불평하지 않고, 제가 할 수 있는 노력을 했다고 기억할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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