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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랑 Oct 17. 2023

신흥 종교에 투신하기

어쩌다 보니 그랬어요

“사실 나는 부처의 환생이란다.” 다정했던 스님은 어느샌가 미친 것이 분명했습니다.


몸도 마음도 지쳤을 때, 따뜻하게 위로해 주는 사람에게 의지하게 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힘들 때 위로해 준 스님에게 의지했죠. 그때만 해도 스님이 이상하게 변해버릴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힘들었던 첫 직장에서 안정적인 회사로 이직에 성공했습니다. 처음에는 날아갈 것 같았어요. 그러나 기쁨은 금세 사라졌습니다. 이곳도 만만찮게 힘들었거든요. 특히 단순 반복되는 서류 업무가 정말 맞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만둘 수는 없었습니다. 이곳도 겨우 들어왔는걸요. 게다가 연봉도 괜찮았습니다. 회사 선배님들은 여자가 다니기에도 안정적인 직장이니 팀장님처럼 오래 다녀라고 격려했습니다. 팀장님은 여자분이셨는데 20년간 회사에 몸 담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회사에서 보낼 20년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구역질이 났습니다.


그때는 절에 다니고 있었어요. 이제 막 시작한 아주 작은 절이었죠. 젊은 주지 스님은 이직에 대한 조언을 해주시는 등 신경을 많이 써주시는 분이었어요. 진심으로 위해주는 스님의 따뜻한 성정 덕분에 신도님들이 조금씩 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직한 지 1년쯤 되었을까요. 저는 회사 스트레스로 돌아버리기 직전이었어요. 안 좋은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하진 않을 게요. 제게는 힘든 회사였지만, 누군가에게는 좋은 곳이었으니까요. 매일 울면서 퇴근했다는 정도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간절히 원한 이직이었고, 감사한 마음으로 회사를 다니고 싶었습니다. 월급도, 상여금도 넉넉했고, 누구에게든 떳떳할 수 있는 직장이었습니다. 부모님도 이곳에 다니는 걸 좋아하셨고요. 그런데도 저는 이 좋은 회사가 너무 싫었습니다.


스트레스가 쌓이니 가족에게 화를 내기 일쑤였습니다. 매일 이어지는 야근에 친구를 만날 체력도 없었습니다. 제 인간관계는 모두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다 포기하고 싶었지만, 주말마다 스님의 법문으로 위안을 받으며 간신히 정신줄을 붙잡았습니다.


회사가 싫다는 마음의 소리를 무시했더니, 몸도 회사를 싫어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출근만 하면 손가락부터 발가락까지 온몸의 관절이 아팠습니다. 물리치료를 받아도 소용없었어요. 의사 선생님은 스트레스가 심각해서 생긴 통증이라고 진단해 주셨습니다.




몸이 아파 일상생활까지 어려워진 저는 주지 스님에게 독대를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스님 앞에서 엉엉 울었습니다. 그 당시 제가 의지할 사람은 스님밖에 없었거든요.


스님은 제가 한참을 울고 진정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이렇게까지 힘들다면 회사를 그만두고 근처로 이사를 오면 어떻겠냐고요. 절에서 자주 머물면서 마음을 추스르면 좋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집에 돌아가 가족들과 잘 상의해 보라고 하셨죠.


상의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당장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니까요. 어차피 회사와의 관계도, 부모님과의 관계도 최악인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사직서를 제출하고 캐리어를 꾸렸습니다. 가족들에게는 당분간 찾지 말라고 통보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살았던 동네를 단숨에 떠났습니다. 퇴직금으로 보증금을 대고 구한 원룸은 작았고, 곰팡이가 자주 슬었습니다. 하지만 어둡고 좁은 그 방은 세상에서 제일 안락했습니다.




절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자 더 이상 손님처럼 있기 어색해졌습니다. 직원도 없는 작은 절이라서 스님이 손수 청소까지 다 하셨거든요. 멀뚱히 구경하고 있을 수는 없어서 자연스럽게 스님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법회가 있는 날에는 방석을 정리했고, 신도님들 안내를 했습니다. 초파일처럼 특별한 날에는 스님과 함께 불단에 올릴 과일을 사러 갔습니다. 스님은 형편상 돈을 줄 수 없어 미안하다고 하셨습니다. 대신 보시로 들어온 쌀과 김치를 챙겨주셨습니다.

젊은 스님의 신선한 법회는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신도님들이 늘어나자 우리 절은 조금 더 큰 곳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저처럼 일을 함께하는 사람들도 생겼습니다.


사람들은 많아졌지만, 스님은 여전히 저를 초창기 멤버라고 부르며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스님 덕분에 절의 신도님들은 저를 존중해 주셨습니다. 나이 많은 어르신들도 저를 ‘보살님’이라고 불러주셨지요.


이렇게 수입 없이 절에만 다니는 생활이 2년쯤 계속되자, 퇴직금이 바닥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취직하고 싶지 않았어요. 회사라면 지긋지긋했으니까요. 절 살림을 돕는 것이 훨씬 좋았습니다. 씀씀이를 줄이고 급할 때는 아르바이트를 하면 버틸만했습니다.


우리 절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고, 사람들이 모이고 있었습니다. 스님과 신도님들은 절에서 봉사하는 제게 고맙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마음만으로도 제 노력이 충분한 보상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한 번은 이 절에서 20년 정도 보내면 어떨까, 상상해 보았습니다.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어느 날, 스님이 변했습니다.


절이 커질수록 스님은 피곤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스님의 말로는 신도님이 늘어날수록 한분 한분 진심으로 기도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했지요. 항상 너그러웠던 스님의 미소가 점점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너무 피곤한 나머지,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당황스러웠습니다. 인자했던 사람이 점점 상식 밖의 행동을 하니까요. 하지만 스님의 곁을 떠날 생각은 좀체 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스님만을 바라보고 현실에서 도망쳐 왔단 말이에요. 지난 2년 간 스님의 다정함을 의지해 살았다고요.


하지만 모든 것에는 때가 있나 봅니다. 아마 제가 그곳을 떠날 때가 온 거겠죠. 오래 지나지 않아 단호하게 결심할 수 있는 계기가 왔습니다.


법회가 끝나고 신도님들이 모두 돌아간 저녁이었습니다. 스님은 빈 법당에서 목탁을 쳤고, 저는 스님의 뒤에서 방석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목탁을 내려놓고 뒤를 돌아보더니 저만 알고 있으라며 고백하셨습니다.


“사실 나는 부처의 환생이란다.”


저는 무척 놀랐습니다. 부처의 환생이라니요! 스님은 놀란 저를 토닥여 주시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저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법당에서 한참을 앉아있었습니다.


아, 다정했던 스님은 어느샌가 미친 것이 분명했습니다.


이날 저녁을 계기로 미련 없이 절 생활을 정리하였습니다. 돌아보지 않고 떠나게 해 준 스님에게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절 생활을 정리하고 현실로 돌아갔습니다. 한동안은 여러 가지 감정들로 복잡했습니다. 특히 스님에 대한 배신감이 컸습니다.


저는 불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스님이 좋아서 그 절에 다녔습니다. 스님과 함께 작은 절을 키워가는 과정이 뿌듯했습니다. 지난 2년 동안, 스님은 제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런 분의 변질은 오랫동안 저를 괴롭혔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불자님이 알려주시길, 제가 다녔던 곳은 절이라기 보단 무속의 한 형태에 가깝다고 합니다. 어찌 보면 신흥 종교와도 같은 곳이라고 하네요. 모태신앙이었던 저는 기독교 외의 지식이 없어서 전혀 몰랐습니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모른 채 신흥 종교에 투신했던 사람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그 절도, 스님도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궁금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안녕하길 바랍니다. 어쨌거나 제가 스님에게 얻었던 위안은 진짜였으니까요. 신도님들도 좋은 점이 있으니 절에 오셨겠지요.


만약 스님이 히스테리를 덜 부리고, 자신의 비밀을 꼭꼭 감추기만 한다면 잘 지내고 있을 것 같습니다.




만약 힘든 현실에서 무작정 절로 도망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보다 정확하게 하면 ‘스님’에게로 도망치지 않았다는 가정을 해보겠습니다.


회사를 그만두기는 잘했습니다. 1년씩이나 버틴 것이 신기할 따름입니다. 절에 다니면서 가진 휴식기도 잘한 것 같습니다. 다만 이 기간을 다르게 보냈어야 했습니다. 스님에게 의지하기보다는, 제 자신에 대해서 깊이 탐구하며 미래를 생각해야 했습니다.


두 번의 직장 생활 실패를 냉정하게 분석했다면 제가 어떤 것을 힘들어하는지 알 수 있었을 거예요. 절에서의 생활이 즐거웠다면 어떤 부분이 좋았는지를 구체적으로 파악해야 했습니다. 제 자신에 대해 정확하게 알수록, 어떻게 하면 행복할지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제가 행복한 미래를 찾을 시간은 1년이면 충분하지 않았을까요? 완벽한 청사진은 아니더라도, 방향성은 찾았을 거예요. 그랬다면 스님의 히스테리가 시작하기 전에 절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사회로 나왔을 것 같습니다. 덕분에 빨리 헤어질 수 있었다면 제 기억 속의 스님은 다정한 분으로만 남았을 수 있었겠지요.



그때의 기억을 날조합니다.


사회초년생 시절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결국 저는 직장생활을 잠시 접고 쉬기로 했습니다. 평소 다니던 절에서 충분한 휴식의 시간을 보냈지요.


휴식 시간은 제가 어떨 때 힘든지, 어떨 때 기쁜지를 탐구하며 제 자신을 찾아가는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스님과 신도님들이 많이 응원해 주셨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을 충분히 알고 난 후 선택한 직장은 훨씬 좋았습니다. 이제야 제 자리를 찾은 것 같았어요. 지금은 절에 가지 않지만, 힘들 때 응원해 주셨던 그분들에게는 언제나 감사한 마음이랍니다.



마냥 타인에게 의지한 것이 아니라, 제 인생의 중심을 자신에게 두었다고 기억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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