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비가 오지 않았지만
온몸이 젖어 있는 기분이었다.
오전 내내 마음이 흐트러졌다.
늘 듣던 음악이 평평하게만 들렸고,
코끝에 닿은 커피 향도 감각을 건드리지 못했다.
가을은 끝나가고 있었고,
나는 나를 다시 다잡을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것이 도넛이었다.
달콤함이라는 건 가벼워 보여도
가끔은 꽤 깊은 위로를 건넨다.
백석역 근처로 향했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누군가 나를 찾지 않을 것 같은 곳,
지나가는 사람이 나를 알아보지 않는 곳이면 충분했다.
그러다 건물 모서리에 붙은 던킨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브랜드.
그러나 오래 들여다보니,
왠지 모르게 낯설게 느껴졌다.
문을 밀고 들어섰다.
적당한 조명.
정돈된 진열대.
그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도넛들.
나는 그 중 글레이즈드 하나를 집었다.
평범해 보이는 그것을 고른 이유는,
그날 내 기분과 너무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겉은 반짝이지만, 속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
그리고 커피.
아이스 아메리카노.
쌉쌀함이 목을 타고 내려갈 때,
어느 부분이든 괜찮아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창가 자리에 앉았다.
유리창 너머로는 사람들이 스쳐갔다.
어깨를 움츠린 사람들,
전화에 몰입한 사람들,
눈을 내리깔고 걷는 사람들.
그 모든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나도 누군가에게는 그런 존재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잠깐 스쳤지만, 기억되지 않는 얼굴.
커피 한 모금, 도넛 한 입.
당도가 입안에 퍼지는 순간,
기억의 조각들이 둥글게 굴러 나왔다.
예전 어느 오후,
서울 종로의 어느 골목에서
혼자 도넛을 먹던 누군가의 뒷모습.
그 사람은 나였을까.
아니면, 내가 기억해낸 타인이었을까.
시간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고,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나를 보지 않았고,
나는 안도했다.
나의 오늘은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이 조용한 순간을,
지금 내 안에 감도는 정적을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도넛은 절반쯤 남아 있었고,
커피는 살짝 미지근해졌다.
나는 그걸 다 먹지 않았다.
대신 머릿속 어딘가에 저장해두었다.
백석역 어느 가게의 조용한 테이블,
말없이 시간을 받아주는 공간,
그리고 그날의 내 표정까지도.
그렇게,
나는 잠시 멈춰 있었고,
다시 조금씩 걷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
나만의 방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