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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그레이스콘 Mar 25. 2021

제사

#마흔여섯 돌아보기 08.

"배추전은 밀가루 맛으로 먹는 거야." 어머님이 전기 후라이팬을 꺼내오시며 말한다. “네~ 배추전은 밀가루 맛이죠. 이파리 시원한 맛이랑요.”라 맞장구 치며, 배추전 반죽을 간간하게 만든다. 전 반죽치고는 소금이 좀 더 들어갔다 싶을 정도로 간을 맞추는 거다. 며느리 13년의 배추전 노하우. 시댁은 제사 때마다 배추 한 통을 다 부친다. 일 년에 제사가 6번이고 배추 한 통의 이파리 대략 25장 내외, 얼추 계산해도 그동안 2000장 가까이를 부쳤으니, 노하우라 부를 만도 하다.     


오늘은 시조모님 제사이다. 남편의 할머니. 물론 실제로 뵌 적은 없다. 아버님은 당신 아버지보다 어머니 제사에 제일 공을 들인다는 생각을 매번 한다. 밤을 치시며 "오늘은 엄마...우리 엄마 제사지"라는 혼잣말씀 낯선 그리움이 묻어났다. 아버님께 제사는 정체성과 관계된 중요한 존재같다는 생각이 든다. 무릎과 허리가 아파 절을 겨우 하시면서도 표정에는 진지한 사명감이 가득하다. 장남이 아니신 데도 3대 제사를 모두 모신다. 어머님은 '제발 내년부터는 제사를 두 분 합치던지, 음식 가짓수를 줄이자'고 얘기하시지만, 아버님은 언제나 묵묵부답이시다. 전쟁과 보릿고개를 경험한 세대의 사고라고는 하나, 그 고집이 좀처럼 바뀌기 어렵다.     

 

제사가 익숙한 집에서 자랐지만, 나는 제사 때마다 생각이 많아진다. 음식 장만이 힘들어서는 아니다. 친정 제사에 비하면 제관도, 음식도 적어서 비교적 '수월한' 편이다. 엄마는 ‘조상 받들어서 득이면 득이지 손해 볼 껀 하나도 없다’고 하셨다. 불천위까지 모시는 종가에서 자란 엄마는 내게도 항상 제사를 중요하게 가르치셨다. 나도 제사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는다. 돌아가신 누군가를 기리기 위해 가족이 정기적으로 모인다는 것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어느 정도 강제성과 형식이 있는 편이 모임을 지속시키기 더 쉬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제사는 지극히 유의미하다.     


다만 그 형식과 방법이 절대로 '변경 불가'한 것이라 믿는 문화는 고쳐야겠다. 다 먹지도 못할 음식을 전부 만들어 상을 푸짐하게 차리는 것도 이해가 어렵다. 남편도 기억하지 못하는 시댁 음력 제사를 매번 내가 상기시켜 줘야 하는 이 상황도 우습다. 남편은 정작 친정 제사에 한 번도 참석한 적이 없는데 말이다. 신혼여행 다녀온 날, 어머님은 음력 제사 날짜가 적힌 종이를 제일 먼저 건네주셨다. 그때의 기분이 아직도 묘하다. 어머님의 비장한 표정도 잊을 수 없다.    

  

제사를 마친 후의 거실 풍경은 오늘도 제각각이다. ‘당신의 할 일’을 끝냈다는 아버님의 만족스런 표정과 그 반대의 감정을 괜한 ‘나이 탓’으로 돌리시는 어머님의 억울함이 거실과 부엌 사이를 오간다. 분위기 파악이 빠른 남편이 얼른 청소기를 돌린다. 어머님을 보고 있으면 아버님이 원망스럽다가, 반면 할아버지 옆에서 제사를 진지하게 배우는 아이 모습은 흐뭇하기도 하다. 여러 가지 뒤엉킨 생각으로 속이 체한 듯 울렁거렸다.     


돌아오는 길, 아이에게 물었다.

“지원이는 제사가 어때?”

“음...저는 좋아요! 맛있는 것도 많고. 특히 귀신이 정말 저걸 다 먹고갈까 너무 궁금해요!”

“그렇구나...”

“왜요?”

“그럼 제사 때 할아버지는 어때 보여?”

“진지해 보여요!”

“아빠는?”

“귀찮아 보여요.”

“할머니는 어때 보이셔?”

“....힘들어 보여요.”

애들 눈에도 보일 건 다 보인다.    

 

“제사는 필요할까?”

“왜, 엄마 힘들어요?”

“아니, 엄마는 사실 할머니에 비하면 하는게 별로 없어. 근데 아무도 행복해 보이지 않아서.”

“음... 그럼 저는 나중에 엄마 제사 하지 말까요?”

“....”

그 대답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이런, 나부터도 이렇게 모순투성이다.   

  

“... 엄마를 잊지 않겠다고 약속해주면.”

“네! 노력해 볼께요!”

‘약속한다’가 아니고 ‘노력한다’는 너의 솔직한 대답이 좋았다. 아이가 나를 기억해주는 방식이 어떠하든, 모두가 행복한 방향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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