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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Jun 10. 2016

[포토에세이] 사랑하라 더 사랑하라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사랑하라 더 사랑하라>


# 여는 글


대전예술의전당에 다녀왔다. 정호승 시인과 성악앙상블 소토보체가 펼치는 ‘인문학 콘서트’를 보고 들었다. 몇 편의 시와 노래로 아는 시인을 직접 뵐 수 있다는 것은 자체로 기쁨이다. 오래 기다렸다. 특유의 정제된 언어와 정서로 아프고 슬픈 현실에 따뜻한 시선의 사랑을 보내는 시인. 인문학으로 콘서트를 펼친다니 궁금하지 않을 수가. 작가의 삶과 시(詩), 청아한 음색의 소토보체가 펼치는 우리 가곡 산유화와 가고파, 헨델의 음악까지, 눈과 귀가 호사를 누리고 가슴까지 호강을 누린 저녁 시간이었다. 인생에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 가치는 왜 훼손되는가. 훼손된 가치는 어떻게 회복시킬 수 있는가. 현장에서 보고 들은 시인의 강연을 한 톨이라도 흘리지 않기 위하여 집중하고 경청하였다. 아래의 글과 사진은 수기(手記)한 것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최선으로 정서(精書)한 내용이다.


나의 손이 시인의 강연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여 흘리거나 놓쳐버린 것들은 이곳에 옮길 수 없다. 그것이 다만 애석할 따름이다. 약해진 나의 기억력은 기록에 의존한다. 혹여 내 우둔한 청력으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잘못 알아들어 잘못 이해하고 잘못 옮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순전히 나의 잘못이다. 읽는 이의 용서를 바랄 뿐이다. 한 사람이 많은 이의 삶을 다 경험해 볼 수 없는 노릇이어서 저 사람의 경험에서 무얼 배울까, 이 사람의 경험에서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책을 읽고 경험을 나눈다. 그가 겪은 것은 그의 삶이고, 그녀가 겪은 것은 마땅히 그녀의 삶이다. 내가 겪고, 내가 견뎌낸 것만이 나의 삶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대전, 2016



#1 친구


이렇게 많이 오시다니. 매우 감사하다. 앙상블 홀은 마치 어머니의 품에 안긴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따뜻하고 아늑하다. 나이 육십이 넘고 보니 속도의 시대에 발을 맞추기 어려운 세대가 되었다. 급변하는 21세기가 아닌가. 속도의 삶에서 때로 허우적거린다. 사용하는 노트북이 말을 안 들으면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다. 어쩔 수 없다. 툭하면 아들을 불러댄다. 어찌 보면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오늘 나는 이 강연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는 무엇인가, 그 가치는 왜 훼손되어 지는가, 훼손된 가치의 회복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서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여러분은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건강을 잃은 경험이 있는 자는 건강이라고 대답할 것이고, 봉사와 사랑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권력과 지위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가치 있는 한 가지는 무엇이겠는가. 두말하면 잔소리다. 돈이다. 재화이다. 이는 생존의 필수 요소이다. 시인은 돈을 싫어할 거라고 생각하시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얼마 전 모 자동차 광고에 나의 시를 몇 줄 인용해야겠다고 허락해달라는 제안이 왔다. 저작권과 관련된 문제였다. 나는 기획사 후배에서 모든 일을 네가 좀 알아서 해달라고 위임하였다.


@대전, 2016


속으로 광고 회사에서 나의 시를 쓰는 대가로 얼마를 제시할까 엄청 궁금했다. 뭐 백만 원 안팎 정도 될 거라고 생각했다. 예상하기는 백만 단위였는데 천만 단위였다. 내가 싫어했을까? 천만에! 아니다(웃음). 나는 돈의 가치만 추구하며 살아왔는가. 내 아들이 대학에 입학할 무렵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 호승아 잘 지내나. 내 아들이 대학에 합격했다. 그것도 스카이 대학이다. 그런데 고민이다. 그렇게 합격하지 않기를 기도했는데 합격했다.

- 니 지금 나를 놀리나? 내 아들은 대학에 떨어지 가, 재수 할라는데.


내 친구는 왜 떨어지기를 바랬나. 사업 실패하고 빚더미 올라앉아서 내일 쫒겨날 지, 모레 쫓겨날 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몇억이 아니라 몇십 억을 넘나드는 빚이었다. 친구는 왜 나한테 전화를 했을까. 시인이 무슨 돈이 있는가. 사업 잘 나가는 친구한테 전화할 일이지, 왜 하필이면 나? 친구는 어찌하여 가난한 시인에게 전화하여 아들 대학 등록금 걱정을 푸는가 말이다. 이쯤 되면 여러분도 눈치챘을 것이다. 한 마디로 돈 달라는 소리 아닌가. 나는 친구의 전화를 끊고 생각에 잠겼다. 남을 도와주며 사는 삶, 돕는 삶. 책을 보면서 알고는 있었지마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명에게도 실천한 적이 없었구나. 내 반성이 시작되었다. 돈을 긁어모아 친구 아들의 등록금을 마련했다.


- 니 바라. 이는 내가 니 아들한테 보내는 장학금이다. 조건이 있다. 갚지 않아도 된다.


나는 갚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다. 내가 그때 친구의 전화를 끊고 돈까지 끊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육십이 넘은 놈이, 야! 호승아. 첫눈 온다. 예순이 넘은 남자가 첫눈이 내린다고 내한테 전화를 한다. 이것은 큰 축복이다. 그때 전화도 끊고 돈도 끊었다면 우리의 사랑과 우정은 진즉에 끊어졌을 것이다. 돈이라는 가치보다 사랑이라는 가치를 얻은 것이다. 다음 슬라이드.



#2 여행



여행

- 정호승


사람이 여행하는 곳은 사람의 마음뿐이다

아직도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의 오지뿐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여 떠나라

떠나서 돌아오지 마라

설산의 창공을 나는 독수리들이

유유히 나의 심장을 쪼아 먹을 때까지

쪼아 먹힌 나의 심장이 먼지가 되어

바람에 흩날릴 때까지

돌아오지 마라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람의 마음의 설산뿐이다

 

- <여행> 중에서, 창비, 2013


<토성에서 본 지구>

탐사선 Cassini 촬영, NASA, 2013(Credit: NASA/JPL-Caltech/Space Science Institute and NASA/Johns Hopkins University Applied Physics Laboratory/Carnegie Institution of Washington).


시(詩) 제목과 본문에서 말하는 ‘여행’은 ‘인생’을 의미한다. 시는 은유다. 물론 지금 시를 공부하자는 것은 아니다(웃음). 우리는 지구라는 작은 별에서 여행하는 여행자이다. 우주에서 본, 토성에서 바라본 지구는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가. 토성은 7개의 고리가 있다는 것은 잘 아실 것이다. 화면에 보이시는가. 화살표로 표시된 작은 흰 점. 저것이 지구의 모습이다. 정말이지 파리똥만 한, 먼지만 한, 젊은 사람들은 알아들을까. 누에알만 한 거, 저것이 지구다. 지극히 작디작은 지구별에서 우리는 여행자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인생이란 여행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날마다 어디를 여행하는 것인가. 돈을 찾기 위한 여행인가.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을 찾아가는 여행이고, 죽음을 향한 여행이다. 빛이 있다면 그림자가 있기 마련이다. 삶이 있는 곳에 죽음이 있다. 여러분 뒤에 있는 그림자를 보라. 형체가 온전한가. 뚜렷하게 잘 보이시는가. 그렇지 않다. 그렇지만 늘 우리 뒤로 그림자가 따라다닌다. 죽음이 이와 같다. 몇 년 전에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구십을 넘은 아버님을 지켜보면서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였다. 인간이 구십 세를 넘기면 남의 도움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돌아가시기 1-2년 전, 뼈만 남았다. 긴 병에 효자 있다, 없다? 시인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시는가. 어림없다(웃음).

 

기저귀를 갈고, 급기야 욕창이 생겼는데 소독을 해도 상처가 쉬 아물지 않는다. 숨을 쉬면 기도가 열리고, 밥을 먹으면 식도가 열리고 닫혀야 정상이다. 그러나 때로 이것이 불가능하다. 목구멍을 뚫어 파이프를 연결하고 영양죽을 공급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으라고 내버려두는 것이다. 마지막 식사를 하시고 입을 다문 지 24시간 만에 돌아가셨다. 어찌나 감사하던지, 눈물도 안 나더라. 자식들 고생이야 말할 수 없지만 정작 당신이 고생하는 모습을 자식 된 처지에서 보기에 너무 힘이 들었다. 사람이 잘 죽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잘 살아야 한다. 잘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랑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야 한다. 사랑을 찾아가는 일이 쉬운가. 나는 육십 중반이 넘었는데 아직도 사랑을 찾고 있다. 시에서 말하는, 마음의 오지, 마음의 설산, 그것이 사랑이다.


삶이란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한

얼마간의 자유시간이다 - 프랑스 빈민의 아버지, 피에르 신부-


여러분은 무슨 단어가 가장 마음에 와 닿는가. 나에게는 ‘얼마간의’라는 말이다. 인생이란 유한하다. 참으로 짧다. 시계는 살 수 있으나 시간은 살 수 없다. 인생이 얼마나 짧은지, 선인들은 이미 가르쳐주고 계신다. 이 나뭇가지에서 저 나뭇가지로 새 한 마리가 뽀르르 날아가는 시간. 살짝 열린 대문 앞으로 백마가 휙 달려 지나가는 찰나적인 시간. 그 짧은 시간 이 인생이란다. 그속에서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런데 사랑하는 법을 학습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학원이라도 다녀서 배우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법은 그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결국, 내 스스로 배워야 한다는 말이다. 공부는 누가 하는가. 스스로 해야 한다. 아무리 부모가 잔소리하고 책을 읽으라고 독촉해도 아이가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사람은 태어나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다가 죽는다. 부모님의 기일이 되었다. 형제들이 모였다. 주로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가. 아버지가 그때 그 땅을 팔아서 현금화해서 말이지, 우리에게 나눠주셨어야지 말이야, 그런 이야기 나누는가(웃음). 남은 이들은 아버지가 남기신 ‘그 무엇’에 대하여 이야기할 것이다. 옛날에 아버지가 나에게 이랬어. 아버지가 그때 나를 사랑하신 거야. 그런 이야기들 말이다.


군대에 있을 때 휴가를 나왔다. 사랑니가 올곧게 자라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 누워있는 ‘수평치(水平齒)’라고 했다. 아버지께서 나를 치과에 데리고 가셨다. 이빨 하나 빼는 것이 얼마나 간단한 일인가.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마취하고 세 시간이 넘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치과 영역에서는 꽤 큰 수술이라고 했다. 어렵게 수술을 마치고 나왔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아버지가 그 자리에서 그대로 기다리고 계셨다. 커다란 솜뭉치를 입에 물고 병원을 나와 아버지와 길을 걸었다. 집으로 오는 언덕길을 말없이 걸어왔다. 함박눈이 어찌나 많이 내리던지, 아버지와 나란히 걸어오던 그때. 아버지와 길을 걷던 그때, 나는 아버지의 기일이 되어서야 알았다. 스무 살 청년의 때에 경험한 그것이, 나이 육십이 넘어서야 사랑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아버지가 정말 나를 사랑하고 계셨구나. 사진 같은 그 한 장, 그것이 사랑, 인간은 사랑을 남길 수밖에 없다. 다음 슬라이드.


@대전, 2016




#3 사랑


어머니의 삶에 사랑의 본질이 들어있다. 무한한, 무한히 가능하기만 한, 어머니의 사랑은 희생과 책임이다. 어머니의 연세가 올해 아흔넷이다. 어머니도 돌아가신 아버지와 똑같은 수순을 밟고 있다. 나는 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낼 수가 없다. 지금 우리 세대가 자식이 부모 곁에서 돌보는 마지막 세대가 아닐까 생각한다. 어머니도 점점 살이 빠지고, 눈을 못 뜨신다. 어머니, 와 이리 잠만 주무십니까?하면 우리 어머니는 저승잠 잔다, 와?하며 힘없이 말씀하신다. 막 태어난 아기들은 잠만 잔다. 먹고 자는 것이 일이다. 아기들은 자면서 큰다는 말도 있다. 이를테면 아기에게 잠은 생명의 잠이다. 그러나 늙은 어른들은 반대이다. 죽음의 잠이다. 어머니를 뵙고 돌아가는 나에게 ‘조심해서 가라’고 인사를 하신다. 조금 더 기력이 있는 경우에는 한 마디 더 보태시는데, ‘걸어가지 말고 차 타고 가라.’ 육십 넘은 아들에게 어머니가 당부한다는 말이 그렇다.


밥은 먹었나? 저녁은 먹었나? 사랑이 이렇게 무한한 것이다. 사랑의 본질 중에서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일까. ‘용서’다. 시인(詩人)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더 잘 용서할까? 천만에요! 시인들도 용서를 잘못 해요(웃음). 용서하지 못하면 관계가 좋아지지 않겠지. 3년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정말 믿었던 후배가 나를 배반했다. 낮에는 일이 바쁘니 잊고 있다가, 밤에는 도무지 잠이 안 오더라. 미칠 것 같았다. 성경에 보면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해가 지면 더욱 괴로워지는 것이었다. 견딜 수 없어 신부님께 여쭈었다. 신부님, 도무지 잠을 못 자겠습니다. 신부님이 대답하셨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사랑을 깨닫기 위하여 미움과 증오가 필요한 것입니다. 밝은 대낮에 하늘을 보십시오. 별은 밤이 되어야만 보입니다. 진정한 사랑의 별을 보기 위해서는 증오와 미움이 필요합니다. 종국에는 용서가 답입니다. 다음 슬라이드.


전라남도 화순에 있는 은주사에 갔다가 풍경(風磬)을 달아본 적이 있다. 시인의 경험은 시의 근원이 되는 법이다. 풍경은 ‘바람’ 때문에 자신이 가진 가장 아름다운 '소리'낸다. 바람이 없으면 소리가 없는 것이 풍경이다. 관계는 존재의 가치이다. 너와 나의 관계, 자연과 나, 시인과 인간의 관계, 타자(他者)와 나의 관계. 좋을 때보다 좋지 않을 때가 더 많다는 것이 관계의 속성이다. 관계로 인해 힘들지 않은 때보다 힘들었을 때가 더 많다. 풍경은 곧 바람이고, 바람은 곧 풍경이다. 사랑의 관계가 이러하다. 은주사에 계신 스님께서 와불(臥佛)님을 만나게 해주겠다고 하셔서 길을 따라나섰다.


와불이 일어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속설이 있다. 두 분이 누워있더라. 부부불, 연인불이라 불리는 와불. 천 년 동안이나 사랑의 관계에 있는 와불. 미움과 증오의 관계였다면 지금까지 그 자리에 그 와불이 누워 있을 수 있었겠는가. 사랑의 진정성, 사랑의 깊이, 사랑의 속성, 사랑, 사랑, 사랑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풍경을 달고 나서 적은 시가 ‘풍경 달다’이다. 단숨에 시를 쓴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보통 30-40번, 아니 그 이상 수정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시인이다. 단숨에 이 시를 쓸 수 있었던 것은 와불님이 나를 위해 사랑을 베푸신 것이다. 안치환이 작곡하고 안치환이 노래했다.



풍경 달다

-정호승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 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중에서, 열림원, 2011



안치환, 풍경 달다

https://www.youtube.com/watch?v=MWRmCNQaT6o




설해목(雪害木)

- 정호승


천년 바람 사이로

고요히

폭설이 내릴 때

내가 폭설을 너무 힘껏 껴안아

내 팔이 뚝뚝 부러졌을 뿐

부러져도 그대로 아름다울 뿐

아직

단 한번도 폭설에게

상처받은 적 없다


- <밥값> 중에서, 창비, 2011



나무와 눈은 서로 피해를 주거나 받는 관계가 아니다. 서로 너무나 뜨겁게 사랑하여 눈은 나무를 안았고, 나무는 눈을 힘껏 안아 부러진 것일 뿐이다. 그런데 그는 나를 결코 사랑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관계가 좋지 않았다. 어리석어서. 시가 은유로서 서사 된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육십이 넘어 보니 그것은 분노가 아니었다. 사랑이었다는 것을 이제 안다. 내다 다 받아 먹지 못할 정도로 사랑을 쏟아부어 주셨는데, 나는 그걸 몰랐다. 시는 분노로 쓰이지 않으나 나는 내 인생을 시로 분노하고 원망했다. 미움과 분노의 관계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였음을 이제 안다. 빈 호주머니 털털 털어 나는 몇 번이고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다고 분노하였으나 인생을 들여다보니, 나는 내 인생을 위해서 술을 그렇게나 많이 사고 사는데, 인생은 나에게 아무것도 사주지 않는다고 분노하였으나. 술 한잔, 그것은 사랑인 것이다.



술 한잔

- 정호승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겨울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

나는 몇 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번도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날에도

돌연꽃 소리 없이 피었다 지는 날에도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중에서, 창비, 1999



안치환,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MWPJ5UJmgu8


[정호승의 새벽편지]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http://news.donga.com/Column/3/04/20120712/47704691/1



#4 바닥, 그리고


#5 용서



인생에는 바닥이 있다. 누구나 다 굴러떨어진다. 삼십 대에 인생의 바닥을 경험했다. 여러분 중에 자신의 인생에 아직 바닥이 안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시라. 곧 바닥이 올 것이다(웃음). 나를 받혀주는 것은 바닥이다. 바닥이 존재함으로 내가 바닥에 설 수 있다. 바닥의 가치를 재고해야 한다. 산의 정상을 오를 때 어디부터 걷는가. 산의 밑바닥부터 걷는다. 인생이라는 산의 정상에 오르기 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닥이 있기 때문에 정상이 존재한다. 정상보다 바닥의 존재가 더 가치 있는 것 아닌가. 목표 지향적 삶이란 꼭 정상에 이르러야만 되는 것일까. 경로 지향적, 과정 지향적 삶은 무가치한 것인가. 정상까지 가지 않아도 인생이라는 정상은 누구에게나 있다. 왜 목표 지향적 삶만 추구하는가. 바닥의 존재를 폄하하는 우를 범하고 살아오지 않았는가. 다음 슬라이드


‘탕자의 귀향’, 이는 용서에 관한 헨리 나우웬의 책이다. 용서에 관한 책을 백 권, 아니 그 이상 읽었다고 치자. 책을 많이 읽으면 용서가 되는가. 책을 읽었다고 해서 용서가 되는 것이 아니더라. 렘브란트의 그림이 표지에 있다. 옛날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들고 자유를 찾아 떠난 작은 아들의 이야기. 허랑방탕하게 탕진하고, 창기와 잠을 잤다는 기록까지 있다. 오갈 곳이 없게 되자 돼지가 먹는 쥐염 열매라도 얻어먹기 위하여 돼지막에서 일을 하는 신세가 되었다. 굶주려 죽을 지경에 문득 아버지 생각이 난 것이다. 고향 집에서 일하는 하인들도 굶지는 않을 텐데. 인간으로서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아버지에게 돌아간다.


@하르멘츠 반 레인 렘브란트, ‘탕자의 귀환’. 1662년쯤, 캔버스에 유채, 262×206㎝, 에르미타주 미술관, 상트페테르부르크.


큰 화폭에 그려진 그림이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입을 맞추고 소를 잡고 가락지를 끼운다. 남루한 옷을 벗기고 비단옷을 입혀 아들인 것을 재확인하고 잔치를 벌인다. 서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 아시는 것처럼 큰아들이다. 그는 아버지 옆에서 뭔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다. 아버지,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라고 불평한다. 아버지는 말한다. 나의 것은 다 너의 것이 아니더냐. 저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왔지 않느냐. 생명을 되찾지 않았느냐. 아버지의 사랑은 공평한 것일까? 기억하시라. ‘사랑은 불공평함으로 완성된다’는 사실을. 불공평함으로 아들은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예수가 포도밭 품꾼에게 일을 시작한 시간이 각기 다른 품꾼에게 동일한 품삯을 준다. 얼마나 불공평한가. ‘절대적 사랑’은 그런 불공평함으로 완성된다. 그림을 더 자세히 보겠다. 화면에 잘 보일지 모르겠다. 아들을 감싸 안고 있는 아버지의 손을 자세히 보시라. 두 손이 다르다는 것을 알 것이다. 아버지의 왼손은 남자의 손이고, 아버지의 오른쪽 손은 여자, 즉 어머니의 손이다. 아버지의 강한 손과 어머니의 온화한 손이 동시에 그려져 있다. 손 위로 따스한 햇빛이 비췬다. '어머니의 사랑', 모성애를 제외하고 사랑의 완성을 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아버지의 손에 주목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관계가 힘들 때

사랑을 선택하라  –헨리 나우웬-


관계가 왜 힘든가. 용서하지 않기 때문이다. 용서하지 않으면 사랑이 완성되지 않는다. 나도 용서가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는 용서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을 선택해야 한다. 여러분! 관계가 힘들 때 사랑을 선택하고, 스스로 인생을 만들어 가길 바란다. 인생에 있어 가장 소중한 가치는 사랑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라. 감사합니다.



# 닫는 글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까. 더 치열하게 삶과 마주하는 것.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며 삶을 마주하는 것. 여기에 길이 있다, 저기에 길이 있다 외치는 자 많아도 치우치지 않고 나만의 길을 정중히 걸어가는 것. 그래서 인생에 모범이라 할 수 있는 답이 없고,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삶이 없는 것이 아닐까. 길지 않은 시간에 삶의 진기(眞氣)를 응축하여 전해준 시인께 감사하다. 외로움도 고통도 기쁨도 슬픔도 견디고 또 견디는 것, 시(詩)는 그토록 오랜 묵상과 오롯한 사유(思惟)의 결과였음에 더욱 감사하다.


시인은 시를 사랑하고,

시를 사랑한 시인을 사랑함으로 힘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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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상면 포내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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