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첫 러닝을 기억하는가?
과거의 나를 상당히 후회한다. 왜 나는 좀 더 빨리 시작하지 않았을까?
사진첩을 한참을 뒤적여서야 겨우 꺼내 볼 수 있었던 나의 첫 러닝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요즘에야 꼭꼭 남기는 러닝 어플 캡처 사진, 대회 기록증 등으로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만 첫 러닝은 그저 회사 선배 손에 이끌려 경험 삼아 참가했었던 대회였기에 그리고 벌써 6년이나 지난 터라 희미한 기억일 수밖에.
2019년 5월 26일. 최근에는 서울이 아닌 부산에서만 개최하고 있는 기브앤레이스(Give 'N Race)라는 러닝 대회 상암월드컵공원~여의도공원 10km 코스(하프 코스도 있었는데 그 당시 나에겐 절대 넘볼 수 없는 신계 영역 같았고 3km 코스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달까)가 나의 첫 대회 참가였는데 예컨대 6년 전 생일날 무얼 했는지 떠올리는 것보다 더 어렵사리 그때의 기억을 끄집어 내보자면 날씨가 아주 화창했다, 이렇게 달려서 과연 완주할 수 있을까, 잘 뛰는 사람 참 많다 정도. 결정적으로 대회 기록은 아쉽게도(?) 기록증이 없지만 1:10:?? 였던 걸로 기억한다. 함께 뛰었던 회사 선배님의 기억도 동일하니 아마 맞을게다. 이제는 아득하디 아득한 학창 시절 3000m 오래 달리기, 군 복무 시절 1~2km 구보 이후 단 한 번도 km 단위로 뛰어보지 않았던 내가 연습 한 번 제대로 하지 않고 10km 대회를 참가했단 것은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무리한 시도였고 오만했단 생각이 들 정도다. 마지막 30대로서의 근거 없는 자신감이자 오기였을까. 대회 종료 후 나를 대회로 이끌었던 선배와 또 다른 동료는 첫 대회에서 그 정도 기록이면 굉장히 잘 뛴 거다라고 부러워하셨는데 감사해하면서도 사실 속으로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때였던 것 같다.
러닝이란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고 앞으로 좀 더 해보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으며 잘 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기분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곧바로 다음 대회를 검색해서 신청을 했고 혹서기가 지난 이후 9월 뉴발란스 주최 10km 대회가 나의 두 번째 러닝 대회였다. 솔직히 부끄러운 얘기지만 첫 대회 직후 품었던 목표와 의지는 다음날부터 이어진 온몸의 근육통(러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때라 피니시 라인 통과 후 느꼈던 허벅지, 종아리 통증으로 끝날 줄 알았다. 잊지 말자. 러닝은 전신운동이다.)이 일주일 넘게 지속되자 점점 희미해졌고 마침 날씨가 점점 더워지기 시작하자 연습이란 단어는 내 머릿속에서 조금씩 점유율을 잃어 가더니 정신을 차리고 보니 뉴발란스 대회가 코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인간이란 참으로 망각의 동물이며 게으름에 쉽게 잠식되는 존재인 것 같다. 첫 대회에서 준비되지 않은 몸이라 힘들기만 했던 레이스, 그 이후 찾아온 엄청난 근육통을 망각했고 '조금만 더 있다가', '바람이 많이 부니까', '내일 나가지 뭐' 라는 온갖 게으른 명분을 덧대고 덧대었다. 그렇게 대회 며칠 전이 되어서야 안 되겠다 싶어 동네 한 바퀴 정도 겨우 뛰어 보고서 두 번째 대회에 참가했고 1시간 4분대의 기록으로 피니시 라인을 통과했다. 5개월여 전의 첫 대회보다 상당한 기록 단축이 있었지만 아마도 나 자신에게 부끄러운 레이스라서 기록증 캡처조차 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한데 참 신기하고도 재미있는 사실은 5개월여의 공백이 있긴 했지만, 뛰어봤던 경험이 몸에 기억이 되어 있었는지 첫 대회 때보다 훨씬 수월했었고 대회 후 근육통도 2~3일 정도만에 회복이 되었다는 것이다. 달리면 되는구나, 잘 달리고 싶으면 달려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주로에서 나를 앞서 달리는 멋진 러너들의 뒷모습을 부럽게 바라만 보며 첫 대회 때와 마찬가지로 잘 뛰는 사람 정말 많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저 사람들은 언제부터 뛰기 시작했을까? 얼마나 달리면 얼마나 연습하면 저 정도로 달릴 수 있는 걸까?라는 생각에 '왜 나는 이제야 러닝을 시작한 거지'라는 후회 아닌 후회와 부러움을 가득 남긴 두 번째 레이스를 마친 후 다시 한번 목표와 의지를 다잡고 본격적으로 달려보자 다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공교롭게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모든 오프라인 대회는 취소되고 야외 활동도 한동안은 완전 통제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어 나의 러닝도 멈추고 말았다.
어느 정도 코로나19 상황이 풀리고 서야 제한적인 스포츠 활동이 가능하게 되었고 버츄얼 레이스가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나 홀로 마스크를 착용하고 편하게 아무 코스나 정해진 거리만 달리면 되는 거라 굿즈도 모을 겸 2년여간은 분기에 1번 정도 참여했었고 마치 그동안 수감자였던 것마냥 자유를 찾아 동네 주변 산책로를 뛰고 심지어 지방 출장 가서는 꼭 주변에 공원이나 하천변을 찾아 5~6km 씩을 꼭 달렸다. 아마 한 달에 2~3회 정도 러닝을 조금씩 즐기는 수준이 되었던 것 같다. 대망의 서브 1(10km에 이런 표현 쓰지 않지만)은 나의 세 번째 대회이자 야외 스포츠 활동 제한이 완전히 풀린 후 메이저 대회로는 처음(이 아닐 수도 있다) 개최된 2022년 11월 JTBC 서울 마라톤 10km 코스였는데 그 이후 굵직한 메이저 대회들은 거의 빠짐없이 참가했고 그 상세한 이야기들은 앞으로 차차 따로 다루려 한다.
당신의 첫 러닝은 어땠는가?
차근차근 조깅으로 시작하지 못한 나의 첫 러닝은 대규모 러닝 대회라 웜업도 페이스 조절도 아무것도 모르고 마냥 달리느라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괴롭고 다리가 너무나 무거워 마지막엔 질질 끌다시피 했으며 대회 이후 열흘 동안 엉거주춤 걸어야 했던 고통의 기억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멋진 팔치기와 가벼운 롤링 동작으로 스피디하게 주로를 쭉쭉 치고 나가는 많은 러너들의 뒷모습을 통해 나를 러닝의 세계로 입문시키고야 말았다. 나도 그 멋들어진 뒷모습을 장착하고 또 다른 런린이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고 나 자신에게 러닝을 통한 기쁨과 만족감, 생존감, 자존감을 주고 싶다는 생각에 계속 달리게 되었으며 이제는 10km 코스가 아닌 하프(21km) 코스 완주자가 되었고 최종적으로 42.195km라는 풀코스 완주를 목표로 하고 있다. 어느새 5년이나 지난 나의 첫 러닝은 내 인생에 하나의 변곡점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강한 인상을 남겼고 팬데믹과 게으름 탓에 조금 지연되긴 했지만 2023년부터 본격적인 러너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만 이제와 너무 아쉽게 느껴지는 것은 왜 좀 더 일찍 러닝에 입문하지 않았나, 나의 첫 러닝이 20대 아니 30대 중반만 되었어도 라는 과거의 나 자신이다. 빨리 러닝을 시작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기록, 훨씬 좋은 자세를 가지고 있을 텐데 라는 욕심에 과거의 나를 탓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조급함과 과한 욕심은 러닝에 독이라고 하지만 러닝 대회에서 잘 달리는 20대 친구들이나 50~60대, 심지어 70대 이상의 어르신들 중에서도 나보다 빠르고 멋지게 달려 나가는 걸 보면 솔직히 조바심이 나지 않을 수가 없다. 늦은 시작만큼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데 사실 현실적으로 많은 훈련을 하기가 쉽지가 않다 보니 더 조바심이 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더 늦지 않았음에 감사하며 달려야 하겠지.
당신의 첫 러닝이 나의 첫 러닝과 다른 느낌, 다른 목표를 남겼다 하더라도 지금도 달리고 있는 러너라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번쯤은 하지 않았을까. 아쉬움과 욕심이 가득한 이런 생각들 말이다.
문득 달리고 싶을 때가 있다. 달리면서 내가 살아있음을 느낄 때가 있다. 달리는 내 모습에 취할 때가 있다. 잘 달리고 싶다. 빠르게 달리고 싶다. 멋지게 달리고 싶다. 좀 더 일찍 시작할 걸 그랬다.
하지만 이제는 이렇게도 생각해보려 한다.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이다.
또 이런 말도 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너무 늦었으니 지금 당장 시작해라.
나처럼 첫 러닝이 늦었다고 생각하는 러너라면 걱정하지 마라. 늦었지만 늦지 않았다. 이미 시작했으니까.
혹 아직 한 번도 달려보지 않은 누군가 있다면 걱정하지 마라. 늦었지만 늦지 않았다. 지금 시작하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