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서의 소중함과 목표의 중요성
나의 첫(?) 하프마라톤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23년 12월 한강시민 마라톤대회, 하프마라톤 서브2(하프에 쓰는 표현은 아니지만) 달성했던 이야기.
사실 진짜 첫 하프 대회는 23년 6월에 참가했었던 새벽강변 국제마라톤대회였었는데 구차하게도 뜨거운 날씨와 예상치 못했던 햄스트링 부상으로 인해 약 2시간 40여분의 기록으로 겨우겨우 완주만 했었다. 변명을 걷어내고 보면 월 마일리지가 겨우 10km 밖에 되지 않았던 탓일 게다.
그 이후 절치부심 까지는 아니었지만 중간중간 10k 대회 참가, 동네 조깅 횟수를 조금씩 늘려갔고 11월에는 런생 처음으로 월 마일리지 50k를 넘어 63.5k를 달성하는 쾌거(?)를 이루었더랬다. 하지만 막상 12월에는 대회일인 10일 전에 제대로 훈련을 하지 못해서 걱정이 조금 앞섰는데 11월에 나름 꾸준히 나름 지속주, 나름 거리주라며 연습을 꽤 했었고 대회 3주 전쯤 17k LSD 훈련을 무사히 마쳤기에 2시간 10여 분대는 자신 있었고 2시간 언저리도 가능하리라 봤다.
10k든 하프든 대회에는 나름의 전략이 있어야 한다. 초반부터 기록을 위한 빠른 페이스로 치고 나가서 후반에 어떻게든 힘을 쥐어짜 내느냐 아니면 반대로 초반에는 웜업 느낌으로 시작하여 서서히 페이스를 끌어올리고 후반에 오히려 더 속도를 내는 네거티브 스플릿으로 가느냐 또는 초중반 적당히 본인에게 맞는 페이스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중후반에 남는 힘으로 밀 수 있으면 밀고 가느냐 등 여러 가지 전략이 있지만 나의 선택은 안정적인 페이스 유지 후 남는 힘으로 밀기. 아무래도 직전 대회의 실패 때문에 적당한 수준의 기록으로 무엇보다 완주하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이다.
12월 초 10도 안팎의 쌀쌀한 날씨라 긴 팔과 긴 바지를 갖춰 입고 대회장으로 입성. 내 복장과는 달리 많은 러너들이 반팔에 반바지 차림으로 몸을 풀고 있었다(지금의 나라면 나 역시도 싱글렛과 3인치 쇼츠 차림일 테지). 실패했던 코스와 똑같은 코스라 그런가 더 긴장되는 느낌에 웜업을 어찌했는지도 모르게 어느새 출발 신호를 기다리는 대열에 뒤섞여 있다가 인파에 밀리듯 출발.
많은 런린이들이 가장 많은 실수를 하는 출발 1~2k 구간에서는 이어폰에 들리는 음악에 집중하며 내 페이스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초반 1~2k 구간에 하는 실수란 바로 오버페이스다. 출발 신호와 함께 동시에 뛰쳐나가는 많은 러너들, 뒤에서 나를 앞질러 휙휙 지나가는 러너들이 마치 얼룩말 무리가 초원을 달리는 것처럼 무섭게 치고 나가는데 그것이 대회의 뜨거운 열기와 뒤섞여 묘하게 사람을 자극시키고 흥분시키고야 마는 것이다. 나도 저 무리에 껴야 한다는 알 수 없는 세뇌를 당해버리면 저도 모르게 그 무리에 휩쓸려 초반 오버페이스로 레이스를 시작하게 되고 그로 인해 체력이 급격히 소모되어 남은 레이스를 망쳐 버리게 되는 것이다. 나도 10k 대회에서 초반 오버페이스 때문에 고생한 경험이 있었기에 초반 페이스 조절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나만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4k 정도를 달리자 적당히 호흡이 안정되고 몸에 리듬이 붙기 시작했다. 그쯤이었나. 바로 앞에 누가 봐도 고인물처럼 보이는 러너분께서 '2:00'이라고 적혀 있는 흰색 풍선을 달고 경쾌하게 뛰시는데 그 주위로 네댓 명이 무리 지어 발맞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저거다!! 존재는 알고 있었으나 그간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하지만 이번에는 처음 제대로 뛰어보는 하프 코스이기에 도움이 되리라. 바로 페이서, 페이스메이커였다. 망설임 없이 2시간 페이서 그룹에 합류했다. 아직 페이스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어려운 런린이 수준이다 보니 몸이 풀리기 시작하면 나도 모르게 페이스가 빨라지는 경향이 있었는데 페이서 덕분에 2시간 기록에 알맞은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며 달릴 수 있었고 그 덕분에 페이스에 신경 쓰지 않고 내가 달리는 호흡과 자세에만 신경 쓸 수 있어서 훨씬 더 레이스에 집중하게 되었다. 10k 지점이 넘어서면서부터 자꾸만 힘이 들어가서 올라가는 어깨를 내려주고 호흡을 다잡고 코로 깊게 깊게 들이마시고 크게 내쉬려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런데 마음은 오히려 편하더라. 바로 몇 걸음 앞에 있는 저 페이서분만 따라가면 오늘 2시간 기록 무난하겠구나. 아직 힘은 남아 있으니 열심히 따라가 보자. 그저 페이서 그룹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게만 열심히 달려보자.
10k 지점쯤이었던 것 같다. 페이서 그룹 중에 어느 어르신 한분께서 말을 걸어오셨다. 60대 이상인건 확실해 보일 정도로 꽤 나이가 있어 보이셨고 약간 마르고 군살 없이 탄탄해 보이는 체형에 빨간 줄무늬 모자를 쓰고 계셨는데 출발 지점에서부터 같이 뛰던 분이라 인상에 남는 분이었다.
"아까부터 같이 뛰었죠??"
"네 스타트부터 같이 뛴 것 같아요."
짧은 대화 후 뭔가 파이팅 해라라는 미소를 남기시고는 다시 각자 레이스에 집중했는데 잠시 후 그분은 페이스를 조금씩 올리기 시작했고 100m쯤 앞으로 치고 나가셨다. 순간적으로 나도 따라가 볼까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제야 코스 절반을 달렸고 아직 가야 할 길이 10k가 한번 더 남았기에 욕심부리지 않기로 했다. 혹시나 피치를 올렸다가 후반에 완전 퍼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컸다. 온전히 페이서 그룹에만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나는 페이서분 바로 뒷자리에 자리 잡고 있었고 15k 지점까지 페이서분 등과 어깨너머 도로만 보며 무아지경으로 달리고 있었다. 사실 대회 중반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니 기억이 없다. 절대 페이스 그룹에서 뒤처지지 말자라는 강박에 가까운 집중도를 유지했기 때문일까.
15k 지점을 지나서인가 문득 시선을 멀리 가져가보니 빨간 줄무늬 모자 어르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 치고 나가신 듯했다. 이제 6k 정도밖에 남지 않았구나,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과 함께 잠시 내 몸 상태를 체크해 보았다. 어깨에 조금 피로가 쌓인 듯 하지만 문제 될 정도는 아니었고 종아리나 햄스트링도 오케이. 심박은 계속해서 높은 수준이긴 하지만 호흡에 무리는 없었다. 그래 한번 밀고 나가보자. 2시간 페이서를 가능한 한 열심히 쫓아가보자고 시작했는데 대회 중후반까지 무리 없이 페이서와 달린 것뿐만 아니라 체력이 남아 페이스를 올리게 되다니. 옆에서 함께 달리는 이가 있다는 게 이렇게 큰 힘이 될 줄이야.
감사했던 페이서분과 페이서 그룹을 지나쳐 스피드를 올려 달리기 시작했다. 520~530 페이스를 유지하며 달리다 보니 저만치 앞에 빨간 줄무늬 모자 어르신이 눈에 잡혔지만 끝끝내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520 페이스 이상으로 빠르게 달릴 힘은 없었고 그나마 빨간 줄무늬 모자만 보고 530 페이스 뒤로 밀리지만 않게 죽어라 달렸다. 2k 정도를 남기고는 그분이 더 스피드를 내셔서 결국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빨간 줄무늬 모자를 보고야 말겠다는 목표로 나도 끝까지 페이스를 유지하려 이를 악물고 달렸고 더 이상은 무리다 싶을 때쯤 골인 지점을 통과했다.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가쁜 숨을 달래며 메달과 음료 등을 받은 후 물품보관소 앞으로 가자 그토록 뵙고 싶었던 빨간 줄무늬 모자 어르신을 뵐 수 있었다.
"어르신. 고생하셨습니다. 마지막에 왜 이렇게 빠르세요?? 어르신 모자만 보고 죽어라 달렸는데 죽는 줄 알았습니다 정말."
"오 고생했어요. 몇 분에 들어왔어요??"
"전 아마 56분쯤 들어온 것 같아요."
"난 54분. 허허. 내가 원래 마지막에 좀 빨라. 2분 차면 뭐 같이 들어온 거지."
"어르신 덕분에 마지막까지 힘내서 달렸습니다. 감사해요."
어르신과의 짧은 대화 직후 문자로 도착한 나의 대회 기록.
'01:55:12'
목표했던 2시간 언저리보다 훨씬 좋은 기록이었다. 2시간 언더라니.
회사에서 늘 목표가 중요하다 그렇게나 강조하는 이유를 러닝에서 완전히 공감해 버렸다. 빨간 줄무늬 모자는 눈에 띄는 강렬한 목표물이 되어주었으며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어주었다.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지정된 목표와 동기부여는 나의 퍼포먼스 능력을 향상시켰고 쉽게 지치지 않게 정신적인 에너지를 부여해 줬으며 지칠 때쯤 정신과 육체를 다잡아주었다.
지금에 와서 정리해 보면 이 대회에서의 기록은, 보이지만 쉽게 잡히지 않는 거리에 있던 어느 어르신의 빨간 줄무늬 모자와 그것을 목표 삼아 끝까지 내 페이스를 포기하지 않았던 의지와 대회 전까지 날이 춥고 귀찮아도 억지로라도 러닝화를 신고 나가 힘들게 완수했던 훈련 덕분이었다.
목표, 의지, 훈련.
이것들의 조합이면 곧 있을 풀코스 첫 도전에서도 나에게 지는 일은 없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