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많고 탈도 많은 카본화에 대하여
운동은 장비빨.
혹자는 실력이 아닌 장비에 의존하거나 탓하는 것은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라고도 하고 다른 누군가는 좋은 장비가 실력에 더해지면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고 장비를 찬양하기도 한다.
사실 정답은 없지 않을까 싶으면서도 나는 장비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라는 생각에는 긍정적인 입장이다.
모든 스포츠 브랜드들이 앞다투어 신기술을 도입한 신제품들을 한 시즌 안에서도 여러 개를 출시해대고 있고 실제 그 브랜드의 후원을 받는 각 종목들의 선수들이 세계 신기록을 세우거나 우승이라도 하게 되면 어떤 경기복을 입었는지, 어떤 라켓을 썼는지, 어떤 신발을 신었는지 등이 각종 언론 매체들의 주요 소스가 되고 있으며 사용자들의 구매로 직접 이어져서 곧바로 수많은 후기들이 블로그나 인스타그램 등의 SNS에 도배되고 있다. 호평받은 제품이나 연이어 출시되는 동일 라인 제품들은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순식간에 품절 사태가 벌어지고 리셀 시장은 그야말로 호황을 누리고 있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인간의 육체와 온전한 실력만으로 경쟁하는 시대는 이미 먼 과거가 되어버렸다. 장비도 실력의 일부가 되어버린 시대.
그 중심에 러닝이 있다. 골프에서 시작된 특정 스포츠에 대한 열풍이 테니스로 이어지더니 이제 러닝 시장을 휩쓰는 중인데 지금 우리나라의 러닝에 대한 열기는 그야말로 뜨겁다 못해 폭발할 지경이다. 덩달아 러닝 장비 시장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몸집을 불리고 있는 중인 와중에 러닝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러닝에 장비가 필요하냐 라는 부분이다. 그냥 적당히 집에 있는 운동복에 신발장 한 켠에 고이 모셔두고만 있던 오래된 운동화 한 켤레면 되지 않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니다. 러닝에는 생각보다 많은 장비가 필요하다.(꾸준히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어야겠지만)
크게는 우선 상하의, 러닝화 이 두 가지가 필수.
먼저 러닝복은 어느 운동이나 마찬가지겠지만 특히나 장시간 지속해야 하고 땀이 많이 나는 운동이기 때문에 가볍고 흡습, 건조 기능이 좋아야 하고 팔다리 움직임에 방해되지 않도록 활동성과 신축성이 좋은 기능성 의류여야 한다. 사실 의류는 종목과 관계없이 대부분 스포츠 의류라고 불리는 것들이 흡습, 건조, 신축성 등 기본적으로 기능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고르고 고르지 않아도 무방하다. 다만 완전한 런린이 수준을 벗어나 기록 향상을 목표로 하거나 하프마라톤이나 풀코스 마라톤 등을 준비하고 즐기는 수준 정도라면 마라토너 복장의 정석인 싱글렛과 3인치 쇼츠나 타이즈를 구비하여 장비 버프를 노려봄직하긴 하지만, 있으면 좋고 없어도 뭐 크게 상관없지 않나 싶을 정도.
핵심은 러닝화다. 요즘 러닝 시장에서 가장 뜨거운 화두.
러닝화의 세계는 특히나 무궁무진하다. 아니 갑자기 무궁무진해졌으며 지금도 무궁무진해지고 있는 중이다. 과거 독보적인 2강 체제를 유지하던 나이키와 아디다스의 아성을 무너뜨릴 정도로 위협하고 있는 아식스, 뉴발란스, 호카, 온러닝 등의 약진으로 인해 러닝화 시장은 지금 춘추전국시대다. 각 브랜드들에서는 레이싱화를 비롯해서 트레이닝화, 안정화 등 목적이나 기능별로 등급을 달리하여 최상위 등급부터 3단계 많게는 5단계 정도까지도 세분화하여 러닝화를 출시하고 있는데 그중에 레이싱화, 트레이닝화(최근에는 슈퍼트레이닝화라 불리는 등급도 출시됨.)는 출시되는 족족 온라인은 1분 컷 품절, 오프라인은 오픈런이 아니면 구매하지 못할 정도로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레이싱화는 주로 카본화를 말하는데 발바닥과 신발 밑창 사이에 카본플레이트를 넣고 미드솔이라 부르는 신발 바닥 부분에는 두툼한 쿠션을 적용하여 달리는데 필요한 반발력과 충격 흡수 기능을 극대화시키고 무게를 최소화하여 더 가볍게, 쉽게, 빠르게 달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신발이다. 세계적인 마라토너 엘리우드 킵초게, 켈빈 킵툼 두 선수 모두 서브2 깨기 직전의 2시간 0분대 기록을 세울 때 소위 '슈퍼 슈즈'라 불리는 카본화 중에서도 나이키 알파플라이 시리즈를 신고 달렸고 가장 최근 여자 마라톤에서 마의 벽이라고 여겨졌던 2시간 10분 벽을 허물고 2시간 9분대로 세계 신기록을 달성한 루스 체픈게티 선수도 나이키 알파플라이를 신고 달렸는데 많은 언론에서 이 기록이 '신발 전쟁' 속에서 나왔다고 표현했다. 그만큼 신발에 대한 과학 기술의 발전이 기록 단축에 기여한 바가 크다는 것이다.
러닝화 전문 블로거나 유튜버도 아닌데 왜 이렇게 카본화에 대한 썰이 긴 것이냐. 나 또한 카본화를 신고 있고 신봉(?)하기 때문이다.(어쩌면 조깅화뿐만 아니라 카본화도 여러 켤레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자기 정당화)
블로그, 유튜브에 넘쳐나는 카본화에 대한 이야기들은 가지각색이다. 실제 선수 출신이나 코치, 서브3 기록 보유자들 많은 유명인이자 전문가들이 있지만 그들 안에서도 의견은 갈리고 있다. 과연 초보에게 카본화가 괜찮은 것인가. 러닝 입문자들은 달리기 근육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달리는 기능이 극대화된 카본화는 오히려 부상을 유발할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지만 무리하지 않는 수준이라면 무슨 신발이든 크게 상관없다 오히려 본인 마음에 드는 신발을 신고 기분 좋게 달리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다.
40대 중반에 런생 2년차(최초 대회 참가는 19년이었지만 코로나 기간도 좀 빼고 본격적으로 달린 시점부터)이자 카본화 3종(나이키 베이퍼플라이3, 뉴발란스 퓨어셀 엘리트V4, 아디다스 아디제로 프라임X2), 안정화 1종(뉴발란스 프레쉬폼 1080V12)을 보유하고 경험한 러너로서의 내 생각은 이렇다.
"카본화, 신고 싶으면 신어라."
내가 처음 신어본 카본화는 나이키 베이퍼플라이3. 당시 신발 중 가장 가벼운 무게를 자랑하면서 단/중거리 레이싱용으로 알맞다고 알려진 녀석이었는데 사실 그때의 나는 10k를 겨우 55분 언저리로 달리던 런린이라 실력으로만 보자면 카본화를 거들떠볼 수도 없는, 봐서도 안 되는 수준이었지만 디자인이 예뻐서, 워낙 카본화카본화 말이 많아서 궁금하기도 해서 마련하게 됐었다. 그 녀석을 처음 신고 짧게 달렸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이렇다.
감히 내게 허락되는 신발인가.
그야말로 충격이자 신세계였다. 새 신발 경험차, 적응차 아주 가볍게 천천히 뛰려 했으나 신발이 나를 가만 두질 않더라. 발바닥에서부터 엉덩이까지 탕탕 밀어주는데 내 발이 저절로 굴려진다고 느낄 정도로 그 반발력이 엄청나서 아주 조금 과장하자면 다리가 거의 반자동으로 움직이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착지할 때의 그 부드러움이란!! 반발력에 쿠셔닝까지 너무 잘 갖춰진 그 녀석과 함께 6k 정도를 뛰었는데 대회 페이스로 달린 줄도 모르고 있다가 3k 정도 지나서 숨이 가쁘게 차오른 다음에야 조깅이 아니라 오버 페이스로 달리고 있었구나를 알아차리고 조깅에 맞는 페이스로 낮춰 달렸다. 혹시나 무리하지 않기 위해서 오히려 낮은 페이스를 유지하려 애써야 하는 아이러니라니. 다만, 역시 카본화는 전문 러닝화라 마냥 편하게 뛸 수는 없었다. 이전에 신고 달리던 안정화나 쿠션화와 비교하자면 갑피가 얇고 미드솔(발을 감싸는 갑피 부분과 바닥 사이의 두툼한 부분)이 높아서 발목이 좀 불안정한 느낌이라 어느 정도의 적응과 훈련이 필요하다고 느꼈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착용감을 잊을 정도의 가벼움과 마치 스프링을 밟는 듯한 반탄력, 푹신하다 느낄 정도의 쿠셔닝은 나머지 다른 단점이라고 할 것들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아서 다음날부터 계속 신고 뛰었고 실제로 열흘 후 춘천마라톤 10k 부문에 참가해서 52분대로 PB를 달성했었다.
물론 계속 신다 보면 몸이 익숙해져서인지 그 특유의 통통거림은 처음 그때만큼 극적으로 느껴지진 않지만 여전히 가볍게 발이 잘 굴려지고 쿠셔닝이 좋다는 느낌은 그대로다. 게다가 기능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디자인적으로도 보통의 안정화류는 대체로 갑피가 두껍고 신발 앞뒤가 뭉툭하여 둔해 보이는 반면 레이싱화들은 갑피가 얇고 전체적으로 신발 몸통이 날렵해서 훨씬 더 예뻐 보이기도 하고 더 빠르게 바람을 가르고 달려 나갈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많은 전문가들은 말한다. 초보자의 경우 발목 근육, 허벅지 근육 등 달리기 근육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카본화와 같은 레이싱화를 신었다가 발목이 꺾이거나 의도치 않은 오버 페이스로 무리한 레이싱을 하게 되어 발목이나 햄스트링 등에 부상을 입기 쉽다고.
런린이 시절에 카본화를 경험한 자로서 충분히 공감하고 동감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절대 신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다. 오히려 경험해 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우선은 동기부여 측면에서 적극 추천한다. 런린이 시절에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러닝에 상당한 동기를 가지기 어렵다. 러닝화를 신고 뛰러 나가는 행위의 시작 자체가 어렵다는 것인데 의류든 장비든 일단 예뻐 보여야, 본인에게 잘 어울려야 자꾸 찾게 된다. 그런 측면에서 나에게 잘 어울릴 것 같은 화려한 색상에 날렵한 몸체, 인기 있는 브랜드 마크 정도면 강력한 동기 중 몇 정도는 되지 않을까. 아, 카본화의 비싼 가격 또한 아까워서 억지로라도 꺼내 신게 만드는 중요 포인트다.
두 번째로는 훈련 효과 측면에서의 추천이다. 이건 지극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자 역설적인 발상인데 초보자의 준비되지 않은 몸상태, 페이스 조절 미숙으로 인한 부상이 우려된다는 내용을 반대로 생각하면, 오히려 초보자로서 카본화의 여러 가지 위험성을 정확하게 인지한 상태에서 의식적으로 최대한 조심하면서 훈련을 진행한다면 비교적 적은 힘으로 훈련의 양이나 질을 효과적으로 늘릴 수도 있어서 성장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베이퍼플라이 3을 처음 신고 달렸을 때 얇은 갑피와 높은 미드솔 때문에 착지할 때 발목이 살짝 흔들리기도 하고 불안정한 부분은 분명히 있었지만 워낙 달리는 느낌과 효과가 좋다고 느꼈기 때문에 계속 신고 달렸었는데 대신 상당히 조심스럽게 훈련을 진행했었다. 최대한 발목 부분의 이격을 줄이기 위해 러너스루프로 신발끈을 잘 조여주고 착지할 때 발목이 꺾이거나 하지 않도록 상당히 착지에 신경을 많이 썼고 무엇보다 오버 페이스 하지 않게 조깅 페이스로만 달리려 노력했다. 자연스럽게 페이스가 빨라지더라도 의도적으로 페이스 다운을 하면서 서너 번 정도 훈련을 했더니 그 후 훈련에서는 착지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면서 자신감이 생기고 조금 더 안정적으로 착지하게 되면서 평소 페이스와 강도로 뛴다고 뛰었는데 5~10초 정도 빨라진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10k PB를 달성한 게 아닌가 싶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카본화에 대한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정말 어디까지나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일 뿐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의 직접적인 경험에 따른 의견임을 분명히 하는 바이며 일부 전문가들과 상당수 사람들은 카본화에 대한 요즘의 관심과 열기를 부정적으로 보기도 하지만 나는 카본화를 상당히 신뢰하는 입장이다.
왜냐고??
나는 이제 막 NRC(Nike Run Club) 마일리지 1,000km를 넘긴 런린이 수준 밖에 안되긴 하지만 고글, 싱글렛, 암 슬리브, 3인치 쇼츠에 마지막으로 카본화까지 신어주면 뭔가 내가 엘리트 선수가 된 것처럼 멋져 보이는 것 같고 빠르게 잘 달릴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기분이가 조크든요. :)
p.s.) 제가 카본화를 신뢰한다고 해서 무조건 카본화만 신지는 않습니다. 평소에는 주로 조깅화를 신고 대회를 앞두고 포인트 훈련할 때 몇 번, 그리고 대회 당일에 착용합니다. 본인 신체 조건이나 주법, 훈련량, 훈련 방식 등에 따라 적절히 카본화를 활용하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