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에 바텐더가 되어보자

by 민달이


결과를 위한 공부를 해 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 내가 왜 한다고 했을까. 덜컥 겁이 난다. 말이나 하지 않았으면 역시 생각해 보니 내 길이 아니야 중얼대며 조용히 혼자 접을 수도 있었을 텐데. 내가 무슨 짓을 하겠다고 한건 지 걱정이 앞선다. 밥을 먹고 정리를 하다가 갑자기 수저통이 보이지 않아 몇 시간 뒤에 냉장고에서 찾기도 하고, 방금 옆에 놓았던 핸드폰이 없어져 하루 종일 연락 한번 하지 못했던 일들도 수두룩하다. 어제 생각났던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저, 그, 아, 그! 따위의 단말마를 내지르기도 한다.


언제부터인가 책을 한 장 읽고 넘기면 방금 전에 무슨 내용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아 자꾸만 다시 넘겨보고 넘겨본다.(아아, 쓰다 보니 더 큰일이네.) 마흔이 넘으니 기억력은 급속도로 나빠지고 지니고 있던 것들도 숭숭 빠져나가는 게 느껴져 서글프다. 내내 영화가 어떻고 음악이 어떻고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고 앉았다가 덜컥 현실의 문제가 닥쳐오자 이거 큰일 났구나 싶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바람이 잔뜩 들어 폼만 잡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조주기능사 시험을 알아보니 필기와 실기가 있다고 한다. 필기는 많이 어렵지 않으니 혼자 집에서 기출문제를 몇 번 풀어보면 된다길래 내내 손을 놓고 있다가 슬쩍 들춰 보았더니 맙소사.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한숨이 푹푹 나온다. 그저 막연하게 있으면 먹고 없으면 말던 나는 이제야 후회가 된다. 먹을 때마다 무슨 술인지 라벨이라도 한번 더 볼걸. 이제 와서 시작하려니 이건 뭐. 까막눈이 따로 없다. 좋은 술이라고 주면 주는 대로 먹기만 했지 별이 세 개고 네 개고 내가 그걸 알게 뭔가. 근데 이건 뭐 장수돌침대도 아니고 술에 별이 다섯 개! 아아,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별은 네게, 아니 세 개뿐이었던 것도 같고.


위스키는 또 왜 이리 종류가 많은가. 싱글몰트는 무엇이고 블랜디드의 유명 브랜드들은 또 왜 이리 많은 가. [바 레몬하트]의 마스터가 싱글몰트 위스키를 쯉! 들이키는 모습을 보며 귀여워만 했을 뿐, 어.. 그게 무슨 위스키였더라... 역시나 생각나지 않는다. 게다가 와인의 품종은 외워도 외워도 머릿속에서 바람처럼 사라지고, 리큐르의 수많은 종류를 보는 순간엔 헉, 소리가 절로 나온다. 달콤하고 새콤하고 은은하고 향기롭고 어머 이건 꿀맛이야! 킬킬 좋아하지 말고 바텐더에게 무슨 재료가 들어 간 술인지 물어나 볼걸. 뭐, 이제와 후회해서 무엇하리.


정신이 뱅글뱅글 돌고 글로만 봤는데도 술을 몇 잔은 마신 것처럼 어질어질하다. 아, 이러면 안 되지. 멋진 바를 열겠다고 모든 사람이 보는 이 곳에 말을 떠벌인 주제에 내가 이러면 안 되지. 마음을 다잡고 다시 한번 시험 범위들을 들춰 본다. 그렇게 몇 페이지를 읽던 나는 계량 및 단위표와 도수 계산법에 무릎을 꿇는다. 으아, 괴로워... 사실, 엄청 어려운 것처럼 엄살을 부렸지만 젊은 친구들은 며칠만 보면 뚝딱 외울 수 있다고 한다. 다만 내 늙어가는 세포들이 시험 당일까지 기억을 잘해줄지가 걱정일 뿐. 그나마 주관식이 아니라 객관식이라 마음이 놓이는 건 사실이다. 60점 이상이면 된다니 뭐 어떻게든 되지 않겠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고.


문제는 필기가 아니라 실기다. 40개의 칵테일 종류와 기법을 다 외워야 하고 시험관들 앞에서 무작위로 출제되는 칵테일을 3개나 만들어야 한다는데 과연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깐깐한 감독관들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 동안 손을 덜덜 떨며 우왕좌왕하는 내 모습을 그려보니 망신살이 따로 없다. 그럼 실기는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 이왕 이렇게 된 거. 실기를 위한 술과 기물들을 몽땅 구매해 버릴까? 아이고. 필기도 아직 보지 않은 사람이 벌써 실기 걱정을 하고 있다. 내가 이렇다. 어쨌거나 무언가를 이루어 내고자 시도하는 일에는 불안과 함께 아드레날린도 증폭되는 것 같다.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그날이 내심 기다려지니 말이다.


머지않은 어느 때에 그 날이 오면, 따뜻한 도시로 가야지. 노을이 지는 하늘을 보며 술을 한잔해야지. 머리가 하얗게 변할 때까지 오래도록 바의 문을 열어 놓고 있어야지. 말없이 나란히 앉아 있어도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해야지. 아아, 아니지 공부를 해야지. 꼭 공부 못하는 것들이 지금 해야 할 공부는 하지 않고 자꾸만 이루어지지 않은 꿈만 꾸는 법이지. 이제 그만 책을 펴자! 세포를 되살리자! 바텐더가 되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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