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도 모두 볼 수 있는 문장 말고. 타인이 모두 공감하는 아름답거나 심금을 울리는 것 말고 나만이 찾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문장이나 음악이나 미술, 혹은 예술이 아닌 성경이나 학문을 위한 모든 것에서도 우리는 우리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무언가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그것은 헛디딘 층계참처럼 우리를 놀라게 하고 좀 체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다시 한번 가다듬게 만든다.
막 연인과 헤어진 사람은 늘 듣던 노래의 가사 속에서 눈물을 흘리고, 또 다른 사람은 떠나보낸 부모님에 대한 회한이 가득한 라디오 사연에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 음악을 들으며 심장 어딘가를 찌르는 듯한 느낌을 느끼기도 하고 덤덤한 일상을 풀어놓은 에세이 한 줄을 읽고 또 읽는다.
최근에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을 읽다가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문장을 발견했다. 천 페이지가 넘는 이 방대하고 처절한 불꽃같은 이야기에서 하등 존재를 빛낼 필요 없는 한 문장이. 그저 흘러갈 뿐인 문장 하나에 잠시 책을 내려놓아야 했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의심이 많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다 그렇지만, 안드레이 안또노비치는 불확실한 것으로부터 빠져나온 첫 순간에는 언제나 굉장히 기쁜 마음으로 아주 쉽게 믿어 버렸다.
[악령] p 559
인간의 심리를 날카로운 바늘처럼 후비고 들어오는 도스토옙스키의 통찰력은 누구나 아는 바이지만 저 흘러가는 문장 하나에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온다. 그도 저런 사람이었을까? 그렇지 않다면 어쩌면 저렇게도 정확히 인간의 면면을 세세하게 읽어 낼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의심이 많은 인간이다. 의심하고 또 의심한다. 의심의 싹을 아예 차단하기 위해 모르는 번호는 숫제 받지도 않는 사람. 누군가 접근해 오는 게 불편하게 느껴진다 싶으면 애초에 곁을 주지 않는 사람. 의심이 많다는 것은 겁이 많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겁이 많기에 의심하고 경계한다. 하지만 이상하지. 이런류의 사람이 오히려 남들보다 사기를 더 잘 당하곤 하니까. 그렇게 주의를 기울이고 신중하게 생각하며 타인과는 웬만해선 돈거래도 하지 않는 나란 인간이 한순간에 너무도 친절한 지인에게 사기를 당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어느 날 너무도 믿고 의지하던 상사가 회사 막내인 나와 몇 명의 친구들에게 최신형 노트북을 싸게 사주마 말했다. 결국 노트북은 오지 않았다. 지인이 그 회사 직원이라 반값에 노트북을 사줄 수 있다고 했을 때 나는 왜 의심 없이 돈을 척 건넸을까? 그는 코찔찔이들의 돈을 받아 들고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도 친구에게 사기를 당한 거라고 말하긴 했지만 결국 그는 도망치듯 퇴사를 했고 돈은 당연히 돌려받지 못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너무도 성실하고 건강한 사람이었으니까. 늘 솔선수범해서 막내들을 챙겨주고 나서서 분위기를 좋게 하는 사람. 나는 아직도 그가 친구에게 사기당한 거라고 믿고 있다. (믿고 싶은 것일까?)
생각해보면 의심 많고 겁이 많은 나 같은 류의 사람은 안 그런 척하지만 실은 남들보다 더 한 관심을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 아무도 필요없다고 말하지만 누군가가 너무도 필요하여 스스로에게 상처를 낸다. 그렇지 않고서야 늘 신중하게 경계하고 의심하는 사람이 어느 순간 마음을 풀듯 탁- 그 모든 것을 놓아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도스토옙스키의 문장을 다시 한번 입으로 소리 내어 읽어 본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의심이 많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다 그렇지만, 안드레이 안또노비치는 불확실한 것으로부터 빠져나온 첫 순간에는 언제나 굉장히 기쁜 마음으로 아주 쉽게 믿어 버렸다.' 읽고 또 읽어도 이것은 나를 두고 하는 말이 틀림없다. 타인을 언제 경계했었나 싶게 '언제나 굉장히 기쁜 마음으로' 나는 늘 사람을 쉽게 믿어 버리고 쉽게 마음을 주는 것이다.(분명히 안 그러려고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가련하고 애처로운 인간이 아닐 수 없다. 겉으로는 냉소적인 척하지만 속은 물러 터진 인간. 의심이 너무 많지만 한 번도 의심하지 않는 인간. 타인의 시선을 불편해하지만 어쩌면 타인의 시선을 기다리고 있는 인간인지도 모른다. 누군가 나를 알아볼까 봐 슬쩍 겁이 나지만 이곳에 글을 쓰고 있는 나라니. 어쩌면 정말 그런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