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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진미 Oct 05. 2019

[무생채] 무생채, 무떡, 무젓갈 3단 변신

막 담근 무생채를 듬뿍 넣어 쓱쓱 비빈 밥을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어머니는 김장 때마다 무생채를 꼭 따로 빼놓으신다. 나는 뭐 비벼주면 먹고 아니면 마는 정도. 김치도 많은데 딱히 따로 해 먹어야 할 이유를 몰라서 해본 적이 없다. 솔직히 시어머니처럼 맛있게 할 자신도 없고.


헌데 며칠 전부터 입맛이 없는지 밥을 잘 못 먹는 남편을 보니 좀 안쓰럽네. 주방 한쪽엔 육수를 우리고 남은 커다란 무 3분의 2가 덩그러니 나를 보며 누워있고. 무생채나 한번 해볼까? 뭐 어려운 김치도 아니고. 생각해보면 무생채라는 게 김치의 기본 중의 기본이잖아? 설마 기본인데... 그 정도야 어렵지 않겠지.


단, 생각하지 말자. 인터넷이 시키는 대로만 하자. 나 따위의 창의력을 갈아 넣지 말자. 많이 당했잖아. 음식에 상상력 따위는 해가 될 뿐. 마음속으로 단단히 다짐을 하고 경건하게 인터넷을 켠다. 무, 마늘, 파, 설탕, 액젓, 고춧가루, 깨, 소금, 매실청. 시키는 대로 준비한다. 일단 무를 썰래. 일정한 크기로. 일정한 크기로 썰 자신이 없으면 채칼을 쓰라네. 그래 채칼만 있으면 끝이지 뭐.


시키는 대로 무를 모두 썰고 소금에 절인다. 이번엔 물을 버리고 고춧가루를 정량을 넣으래. 나는 로봇처럼 시키는 대로 착착 실행한다. 좋아. 상상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자. 잘하고 있어. 이거야. 하지만,,,  여기서 살짝 이상했다. 소금에 잠시 절인 뒤 물을 따라냈는데, 이건 내가 아는 무채의 모습이랑 아주 많이 달라. 왜지? 난 똑같은 크기를 위해 채칼까지 썼는데? 무념무상으로 로봇처럼 시키는 대로 했는데? 이상해. 많이 달라. 너무 이상해. 절인 물을 따라내고 살짝 짰는데 무채가 아니라 왜 떡이 나오지???


이것은 무채인가 무 떡인가


무로 떡을 했네? 나 이번엔 창의력 발휘한 적 진짜 없는데. 그래 고춧가루를 넣으면 괜찮아질 거야. 서둘러 고춧가루를 넣고 비벼도 어쩐지 알고 있는 무생채의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고춧가루가 잘 섞이도록 손으로 흔드는데 이건 무생채가 아니야. 머리채를 잡고 흔드는 느낌이야. 얇다. 너무 얇아. 무채가 아니라 머리카락이야 이건. 하라는 대로 했는데 이모양이라니. 자신 없으면 채칼 쓰라면서요... 굵기는 말 안 해줬잖아요.. 그냥 채칼로 하라고 했잖아요..


그래.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맛만 있으면 되니까... 마늘과 파와 액젓만 잘 넣으면 맛있는 무생채가 될지도 몰라. 맛있으면 그만이지. 혹시 또 알아? 이렇게 머리카락처럼 얇은 굵기의 기묘한 무생채는 내가 최초로 만든 음식이 될지도.. 음.. 한정식집에서 연락 올지도 몰라. 요리연구가 B writer 씨 되시나요?.... 아, 아니지. 정신을 차려야지.


그래도 그렇지. 첫 시작부터 삐걱이니 자꾸 때려치우고 싶어 지는 이 마음.  일단 끝까지 해보자. 고춧가루로 곱게 색을 입히고, 액젓으로 간을 하고, 매실청으로 감칠맛을 돋우고. 좋아, 잘하고 있어. 그럼 마지막으로 깨와 파로 화려한 데코레이션을! 완성이다. 됐다! 일단 하라는 대로 끝까지 마쳤으니 성공은 성공이다.


예쁘게 담을만한 유리병을 찾아서 완성한 무생채를 넣는다. 넣는다. 넣긴 넣는데,,,  어, 아래로 아래로 자꾸 까부라지네. 왜 이래 이거. 벌써부터 스스로 내려앉지 말라고! 다 넣고 숨을 불어넣듯 무생채를 쥐고 한번 들었다 올렸는데도 푸쉬쉬쉬--- 가라앉아.


이것은 무생채인가 무 젓갈인가


며칠 밖에 내놓고 푹 익어야 숨이 죽는 거 아닌가?  왜 벌써 팍 숨이 죽었지? 이상해. 넣자마자 지들끼리 뭉치고 있어. 점점 뭉치며 쪼그라드는 무생채를 보고 있자니 저것은 생채가 아니라 젓갈을 담아 놓은 것 같다. 무 젓갈. 게다가 물김치도 아닌데 물은 또 왜 저렇게 찰랑찰랑해...


에라 모르겠다. 완성했으면 된 거지 뭐. 포기하지 않는 나를 나는 대견하게 생각하겠어. 대단해! 스스로 무생채(무 젓갈)를 만들어 냈어! 하... 힘든 하루였다. 모든 걸 하얗게 불태웠어. 하지만 이것은 무채인가 무 떡인가, 무생채인가 머리채인가 하다가 완성해보니 결국 무 젓갈이 되었지.


탈진한 내가 무생채를 종지에 담아내는 걸 보더니 아니, 무생채를 종지에 담는 사람이 어딨냐고.... 웃긴데 왜 눈물이 나지. 여보. 어쩔 수 없어. 여기에 담아야 돼. 큰 그릇에 담을 수 없어... 많이 먹으면 짤 거 같아... 자 받아. 너를 위해 만들었어. 응? 왜 그래? 혹시 입맛 없는데 내가 더 입맛 없게 만든 건 아니지? 뭐? 갑자기 입이 왜 깔깔한 거야? 어이, 잠깐만 어디가? 그래도 맛은 봐주고 가야지!



종지에 담아 놓으니 진짜 젓갈 같다.


김치의 기본은 무생채라고 떠들어 놓고, 기본도 못하는 걸 까발렸으니 김치 만드는 건 엄두도 못 낸다는 사실만 밝히고 말았네... ...괜찮아. 별일 아니야. 익으면 다 맛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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