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샌프란 생존기
토요일이었던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왔다. 덕분에 빨래도 못하고 멍하니 집 안에서 텔레비전만 봤는데, 만약 서너 달 전이었다면 분명히
무슨 오렌지가 익는 샌프란시스코 날씨가 이래?
이랬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비교적 동요 없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런 날씨에도 오렌지는 잘 익는다는 것을 말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창문의 블라인드 뒤쪽으로 햇빛이 부서지고 있었는데, 사실 이것도 좀 예상했었다. 해가 난 김에 천천히 바깥으로 기어나와 운동삼아 천천히 걸었다. 걷다 보니 또 모르는 곳까지 오게 되었는데, 어쩌면 오래전에 왔던 곳일지도 모른다. 원체 길을 모르니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면서 살게 된다.
약간 배가 고파져서 주변을 둘러보니 'The Art Bistro'라는 카페가 있다. 밖에서 보면 창에 어느 크리스마스에 쓴 것 같은 'Happy Holiday'라는 글씨가 물감이 흘러내린 채로 굳어있어 조금 괴기스럽긴 하지만, 안에 들어와보면 제법 깔끔하고 주인도 성격이 좋아 보인다.
'뭘로 점심을 때울까' 하고 포스 앞에서 고민하다가 진열대에 보이는 애플파이와 커피를 주문했다. 버릇대로 카드를 내밀었더니
현금만 가능해요. 손님!
하면서 미소 짓는다. 마켓 스트리트 근처의 프랜차이즈 카페들은 모두 카드를 잘 받아주지만, 주변부의 로컬 카페들은 대부분 현금만 가능하거나 카드 사용 가능한 최소한도가 있는 편이다. 원래는 현금을 잘 안 가지고 다니는데 - 없어서 - 오늘은 마침 가지고 있어서 주문을 완료할 수 있었다.
앉아 애플파이를 공략하고 있는데, 내 뒤에 들어왔던 손님의 베이글 샌드위치가 배달되었다. 너무 맛있어 보여. 남의 떡이 더 커 보인 다지만, 이건 분명히 착시현상이 아니라 실제로 훨씬 더 맛있음에 틀림이 없다. 베어 물고 씹는 모습이 진짜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애플파이를 먹는 내 모습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적어도 저런 표정에는 미치지 못할 것 같다. 한참 쳐다보고 있었더니 나와 내 파이를 번갈아 쳐다보며 씩 웃는다.
내 것 먹고 싶냐?
먹고 싶었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없어 보일 것 같아서였다. 아는 만큼 보이고 얻을 수 있다는 건 정말 만고의 진리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이 곳에서 다양한 종류의 베이글/크로와상 샌드위치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은 포스 앞 진열대만 둘러봐서는 절대 알 수 없다. 나 같은 경우는 주변 손님들이 뭘 먹고 있나를 확인하고 주문하는 편인데, 당일 이 곳 손님들이 나와 별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라면 그것도 잘 안 먹힌다. 내공 있는 사람이 내 뒤에서 주문해도 낭패다. 오늘처럼 말이다.
Yelp를 찾아보던가 구글 사진 검색으로 'Multiseed bagel with salmon and tomatoes'를 시켜 잘도 먹는 노력파도 있겠지만, 나 같은 경우는 줘도 못 먹는다고나 할까 실제로 그렇게 찾아먹어 본 적도 별로 없다.
이 곳의 로컬 카페나 음식점들은 보통 뒤쪽에 벽면을 가득 채우는 메뉴판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손바닥 만한 카페인 이곳에서도 저렇게 많은 음료와 여러 종류의 샌드위치를 판매하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며 공부하지 않으면 사실 제대로 된 주문을 하기가 쉽지 않다. 나는 식당에서 메뉴 들여다보는 것도 질색이기 때문에 보통은 쳐다보지도 않는데, 덕분에 어딜 가도 비슷하게 커피와 쿠키 정도만 먹게 되는 것인가 보다.
저 메뉴판의 왼쪽 아래에서 이 카페의 스페셜 메뉴인 샌드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데 저기 연어가 어디 있냐고? 하지만, 그 손님은 분명히 연어가 끼어있는 베이글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 이렇다는 건 분명히 포스 앞에서 주인과 대화를 나누면서 숨겨진 아이템을 발견해 내야 한다는 건데, 정말 그렇다면 나는 평생 못 먹을 것만 같다. 자세히 살펴보면 여기저기 숨겨진 정보들이 꽤 많은데, 메뉴뿐 아니라 입간판 같은 추가 정보도 잘 확인해야 베이컨이라도 얹어먹을 수 있을 것 같다.
많은 공부가 필요하긴 하지만 그래도 학습이 완료된 이후에는 주변의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개인화된 나만의 샌드위치를 보란 듯이 먹을 수 있게 될 테니 한 번 도전해 볼만 하지 않을까? 다음에 이 곳에 다시 한번 오게 된다면 꼭 'Multiseed bagel with salmon and tomatoes'를 주문해서 먹어보고 싶다. 그때는 '연어는 좀 많이'라고도 한번 해보려 한다. 밑져야 본전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