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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필모어의 NOAH'S여

좌충우돌 샌프란 생존기

by Aprilamb

주말은 늘 그렇듯 일찍 일어나도 빈둥대다 보면 금방 점심때가 된다.

점심으로 뭘 먹을까 고민하다가 얼마 전 우편물 더미에서 발견했던 NOAH'S 세트 쿠폰이 떠올랐다. 코인 세탁소에서 빨래를 세탁기에 밀어 넣고 나면 서너 블록 떨어진 NOAH'S에 가서 늘 노바록스 베이글 샌드위치 세트를 먹기 때문에, 그 쿠폰만큼은 꼭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잘라두었더랬다.


쿠폰을 주머니에 넣고 설렁설렁 그곳으로 걸어갔는데 안이 텅 비어있고 문에 영업을 종료한다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이틀 전만 해도 지나가면서 손님이 가득 차 있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기분이 더 이상했다. 마치 비행기 사고로 무인도에 겨우 살아남았던 열 명 남짓한 동료 중 한 명이 갑작스럽게 유명을 달리한 느낌이랄까.
이곳에 처음 와서 힘들게 처음 빨래하는 방법을 터득한 후 벅찬 기분으로 점심을 먹었던 내 동지 같은 가게였다. 열 달 동안 나는 빨래를 할 때마다 이곳에 와서 줄곧 기름종이에 둘둘 싸주는 피클이 들어있는 노바록스 세트를 먹어댔는데, 그 동지는 사망했고 나는 더는 그 피클을 먹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제국의 멸망을 확인하듯 얼마 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나는 굳은 결심을 하고 말았다.


노바록스 세트를 먹고 말겠어!



그랬다. 이 고생을 하게 만들었던 미국에 2불 손해를 끼치기 위해 이 쿠폰을 쓰고야 말겠어. 그리고,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지만 마지막으로 NOAH'S에 인사도 하고 싶었다.

이런 추억도 있었던 곳이니까 말이다.


이십 분을 걸어 도착한 필모어 NOAH'S의 샴쌍둥이 같은 또 다른 지점에는 언제나처럼 점심을 사 가기 해가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고, 나는 이곳에서 베이글 샌드위치를 와그작 먹은 후 다른 곳들보다 조금 일찍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었다. 물론 내가 그러든 말든 가게는 영차영차 잘도 운영되고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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