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은 제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이후로 가장 오래 읽은 책이네요. ‘1Q84’는 일 년이 넘게 들고 있었는데, 2권까지 읽은 후 3권이 유독 두꺼워서 바로 시작을 못 했었거든요. 대부분은 2권 이후 3권을 시작할 때까지 묵혀둔 기간이니, 시간 날 때마다 꾸준히 계속 오래 읽은 책은 ‘남아 있는 나날’이 거의 인생 처음인 것 같습니다.
이 책은 두 달에 걸쳐 읽었는데요. 시간이 날 때마다 적게는 서너 페이지, 많이 읽을 때는 2~30페이지씩, 끼니마다 양치질하듯 꼬박꼬박 읽었습니다. 딱히 재미가 없어서 그랬던 것도 아니고, 읽을 때마다 뭔가 급하게 해야 할 일이 생겼던 것도 아니에요. 바로 앞에서 누군가가 ‘왜 그렇게 읽었냐’고 다그치면 진심 아무 말도 못 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 그렇게 읽게 되더라고요.
간단하게 줄거리를 이야기하자면,
영국의 한 집사가 오랜만에 휴가를 얻어 좋은 감정을 품던 과거 동료 관리인을 만나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데….
정도 라고 할까요? 읽으면서 계속 실제 존재하는 인물이 옆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 기분이었는데, 캐릭터들의 개성도 확실하고 이야기 속의 사건들도 사실적이어서 전혀 허구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나를 보내지 마’를 읽을 때도 느꼈지만, 캐릭터의 감정을 이 정도로 완벽하게 글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죠.
처음부터 끝까지 집사의 본분에 관한 이야기만 늘어놓아 지겨웠다는 서평을 보기도 했는데요. 물론 그 내용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작가의 치밀한 작전이었다고 생각해요.
주인공은 주인에게 복종하고 그 말을 따르는 것이 집사의 미덕이라 생각하며, 평소에도 자기 생각을 안으로 숨기고 바깥으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가 사랑하고 있는 켄턴양은 정반대의 성격으로 늘 그와 부딪치게 되고 결국 다른 남자와 함께 떠나게 되죠.
그의 성격을 설명하기 위한 그 장치 덕에, 독자들은 그가 그녀에 대한 감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못하지만, ‘속으로는 깊이 그리워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감정 없이 이야기하는 과거의 사건들 속에서 오래된 가구 위의 먼지처럼 살짝 내려앉아 있는 그의 그리움이나 연민을 찾아내는 재미가 꽤 쏠쏠한데요. 끝까지 덤덤하게 자신의 감정에 대한 변명을 이어가던 그가 마지막에 딱 한 번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내뱉는 부분에서는 나름 카타르시스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 봤자 연애소설의 반도 못 따라가지만 말이죠.
‘실제로 그 순간, 내 가슴은 갈기갈기 찢기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수습하네요.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돌아서서 그녀에게 미소를 보내며 말했다.’
그와 함께 집에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던 그녀는 아마 그의 저런 감정의 폭풍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겠죠? 대부분 집사 설명서를 읽는 듯한 느낌을 받긴 하지만, 마지막 장에서만큼은 수십 년 간직해왔던 그의 연민과 사랑을 절제된 감정으로 고급스럽게 독자에게 전달해줍니다.
그의 사랑과는 또 다르게 진중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주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주인공의 조건 없는 충성을 시대적 상황과 대비시켜, 스스로 사고하지 않는 것에 대한 위험성을 다루고 있는 것이 그것인데요. 덕분에 책을 읽고 나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나를 보내지 마’보다도 더 오래 여운이 남는 세련된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윤식당’이나 ‘삼시 세끼’같은 방송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살짝 추천해 드려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