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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prilamb Sep 02. 2018

부탁하지 말라고요!

서울, 오늘 날씨는 맑음

가끔 이런저런 부탁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은 물건 구매에 대한 조언을 받으려 하거나 기기 사용법을 묻는 것이지만, 가끔은 조금 시간을 들여야 하는 작업을 요청받는 경우도 있다. 그런 작업 중의 하나가 그림을 그려달라는 것인데, 애완견이나 자신의 캐리커처 같은 비교적 가벼운 요청은 크게 부담 없지만 비즈니스 캐릭터나 상점 로고 혹은 행사의 포스터 등 사실 내 능력과는 거리가 있는 부탁을 받게 되면 조금 난감해진다.



나는 부탁을 받으면 그것을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인데, 특히 약간 얼굴만 알고 있는 정도의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다행히 그런 부탁을 잘 들어주게 생기지는 않아서 - 그렇다고 합니다 - 자주 요청받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요청을 받으면 꽤 고민하며 작업하는 편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나는 이과 트랙을 성실하게 밟아 온 사람으로 회화나 디자인 같은 분야는 머릿속에 아예 그 개념 조차 없기 때문에, 전문가들처럼 필요한 정보를 받고는 슥슥 익숙한 작업 프레임웍을 돌려 바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은 쉽지 않다. 아니, 그렇게 할 수 없다. 가끔 할 일이 없을 때 수첩 귀퉁이에 만화를 끄적거렸던 경험은 있지만, 그런 사람은 어디에나 있으니까. 그 이유로 그런 난도 높은 작업을 하려면 비슷한 작품들을 살펴보며 특성을 파악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물론 그러다 보면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재미도 있어서 여유가 있고 가능한 작업이다 싶으면 대부분 잘 수락하는 편이다.


하지만, 거절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요청을 받는 순간 바로 하는 편인데,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이라 그게 참 어렵다. 대부분 '아, 내 능력으로 이건 절대 안 돼.' 하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많은데, 그때는 거절이 어렵던 말던, 거절을 잘하던 못하던, 우선 최대한 빨리 거절하는 것에 집중한다. 아무리 거절이 힘들어도, 나중에 허접한 산출물을 내놓고 상대가 실망하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그런데, 가끔은 능력과는 상관없이 거절하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


'아, 그냥 비용 좀 줄여보려고...'


하며 부탁을 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왠지 그런데 돈 쓰기는 아깝고, 퀄리티는 뭐 크게 상관없으니까. 네가 대충 해주면 안 되겠니?'


이런 거 아닌가? 내가 비록 그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자존심 상한다. 가끔 이런 말을 덧붙이는 사람도 있는데,


'내가 해도 되는데, 그래도 네가 하면 좀 더...'


이 때는 거절뿐 아니라 준비하고 있는 일이 뭐든 그냥 확 망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너무 나쁜 사람인가 하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뭐 그런다고 실제로 망하지는 않을 테니까.

글을 쓰다 보니 갑자기 울컥하긴 했지만, 사실 그런 경험이 자주 있는 것은 아니다. 학생 때 가끔 그런 경우가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지금보다 더 아무것도 몰라서 정말 부탁하는 사람의 작업과 큰 차이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해도 되는데, 그래도 네가 하면 좀 더...'는 나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준 건가 싶기도 하고.


....


만약 그때 개최하시던 행사가 망했다면 죄송합니다. 선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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