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커리어 일지
나는 이제서야 마주한다. 내게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일의 장면에 본업이 없는 걸 발견했을 때를.
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을 때, 사용자 경험(User Experience)이라는 분야에 올인하기로 결심했다. 멀티미디어 디자인과를 졸업하고, 전공이었던 3D 모델링보다 심리학과 행동과학이 결합된 UX가 훨씬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앞으로 디지털과 결합될 많은 일상의 경험들을 생각해보면 휴대폰이나 컴퓨터 화면을 넘어 모든 경험이 디지털화되면서 어떤 인터페이스(Interface)라도 디자인과 설계의 대상이 될 수 있겠다는 야심찬 상상을 했다. 8개월 동안 최종면접에서 세 번이나 떨어지는 힘든 과정 끝에, UX 기획자 신입을 뽑는 중견기업에 합격했다.
선망하던 직업을 얻었지만 첫 입사 때의 뜨거운 열정과 현실은 달랐다. 다른 서비스처럼 언젠가는 프로덕트가 되겠지'라는 희망을 품고 했던 일들이 결실을 맺지 못하고 시시각각 바뀌는 상황이 무기력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기획자로서의 자질이 부족한건 아닐지 생각하며 되려 IT 커뮤니티에 들어가서 역량을 가다듬고, 개발 용어를 배우고, 협업부서와의 진척상황을 문서로 공들여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여전히 일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되자 왠지 내가 문제인 것처럼 여겼다. 잃어버린 일의 의미를 찾기 위해 자신만의 일을 직접 정의하는 습관을 지녔던 문화예술기획자 김해리님이 자아성장 플랫폼에서 진행한 <의미 있는 일의 한 장면 회고하기> 3주짜리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그런데 충격적이었다. 의미 있다고 여긴 일의 순간들 중 본업과 관련된 장면이 단 하루도 없다는 걸 발견했다.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꼈다.
지난 3년 동안 나와 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첫눈에 반한 직업과 회사가 나와 맞지 않았지만,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모든 애정이 짜게 식어버렸다. 같은 업으로서의 이직이 아닌 퇴사(이별)만이 답이었고, 기존의 업은 더 이상 내 삶의 방정식에 들어가는 변수가 아니게 되어버렸다.
비록 한 분야에서 10년 이상 일하면서 느낀 고민은 아니었지만, 온 마음과 에너지를 쏟았던 일에서 점차 멀어지는 경험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회사의 과업들은 실험 단계에만 머물렀고, 상용화되지 않은 여러 프로덕트들은 비즈니스 임팩트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회사의 방향성이 매일같이 바뀌면서 2-3년간의 노력이 허공으로 사라졌고 내 감정은 그럴만 했다.
이를 통해 '일'도 나와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회사에 입사하거나 일을 시작한 사람들에게, 일하는 동안 스스로에 대해 혼란스러울 때 내가 지금 어느 좌표에 있는지 데이터를 수집하고, 스스로의 상태가 어떤지 체크해보는 것으로도 많은 혼란을 뒤로 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내가 진정 가고 싶은 방향을 고민하고, 시도하고, 되돌아보는 회고의 첫 경험을 쌓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미지의 커리어를 향한 항해가 시작됐다.
이미지 출처: 리드앤두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