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잘못이 아니다
암 진단을 받기 약 3주 전은 어버이날이었다. 부모님과 함께 밥을 먹고 산책 삼아 한강공원을 걷는데, 아빠가 내 어린 시절 이야기를 했다. 아빠와 놀이 공원에 갔던 날 이야기였다.
광주의 놀이공원 ‘패밀리 랜드’. 그곳은 광주 어린이들에게는 에버랜드 못지 않은 꿈과 희망의 세계였다. 아빠 손을 잡고 그 환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순간. 나는 아빠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이 말을 했다고 한다.
“아빠, 나 똥 매려워!”
함께 다급해진 아빠는 내 손을 잡고 화장실을 찾아 이리저리 달렸다. 힘겹게 찾은 화장실에 나를 들여보냈다. 그런데 내가 화장실에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아 나오자 아빠는 물었다.
“벌써 끝났어?”
그때 내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똥이 아니었어. 방구였어.”
사실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분명 아빠의 말이 사실일 것이라 믿는다. 아니, 확신한다. 아빠를 믿어서가 아니다. 나는 충분히 저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충분히 납득이 된다.
하지만, 내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 말을 가장 먼저 해준 사람의 직업이 의사일지라도, 심지어 동네 병원도 아닌 대학 병원의 교수일지라도, 최첨단 장비를 이용한 검사의 결과일지라도, 심지어 한 번의 검사가 아닌 2차, 3차 추가 검사를 마친 결과일지라도… 믿을 수가 없었다. 온세상이 나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절대 암에 걸릴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아직 젊었고, 매일 같이 달리기를 했고, 나보다 건강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거리에서 낭만적인 담배 연기를 뿜으시는 어르신들을 보며 생각했다.
‘담배도 안 피우는 내가?’
TV에서 연예인들이 건강 검진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생각했다.
‘저렇게 바쁜 사람들도 멀쩡한데 내가?’
내 생활 중 건강을 해칠만한 것을 찾아보니 그토록 좋아하던 술이 있었다. 혹시 그 때문인가 싶었다. 인터넷에 림프종이 걸리는 원인을 검색해보았다. 원인은 알 수 없다고 했다. 교수님께 진료를 받을 때 림프종은 왜 걸리는 지 여쭤봤다. 역시 원인은 알 수 없다고 했다. 혹시나 술과 관련이 있냐 물었다. 관련이 없다고 했다. 그래도 치료 받을 땐 술을 절대 마시면 안 된다고 하셨다.
원인 불명.
이 네 글자는 환자를 괴롭힌다. 아무래도 궁금하다.
‘내가 도대체 왜 걸렸을까?’
이 문장은 이렇게 바뀌어 사람을 아프게 한다.
‘내가 이토록 큰 잘못을 했을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철학자, 장자는 나에게 말을 건넨다.
“네 잘못이 아니다. 홍수, 산사태 같은 운명적 사태가 너에게 일어났을 뿐이다.”
장자 철학의 핵심은 안명安命이다. 세상엔 인간의 노력과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결과는 언제든지 노력을 배신하기도 하고, 인간의 힘으론 손 쓸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 안명安命은 이런 운명적 사태를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힘이다.
나는 장자 철학을 좋아했다. 안명安命을 실천하려 노력했다. 어쩔 수 없는 일에는 크게 마음 쓰지 않았다. 그런데, 하늘이 나를 한번 더 시험하려나 보다. 그것도 고난도 킬러 문항으로.. 예기치 못한 난이도 상승에 당황스럽다. 배운 대로 행동하는 게 정말 쉽지 않음을 다시 한번 느낀다. 그래도 '네 잘못은 아니다'고 말해주는 장자의 목소리에 위로를 받는다.
신이시여,
바꿀 수 없는 것들은 받아들이는 평온함을,
바꿀 수 있는 것들을 변화시키는 용기를,
그리고 이 둘을 구별할 줄 아는 지혜를 주소서.
-라인홀드 니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