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밍아웃
정의란 무엇인가? 공리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공동체의 행복을 늘리는 행위는 정의. 공동체의 행복을 해치는 행위는 부정의라고. 암에 걸린 사실을 주위에 알리는 일은 확실하게 공동체의 행복을 해친다. 그 말을 듣고 행복을 느낄 사람은 사이코패스 밖에 없다. 특히 나와 친밀한 관계일수록 그들이 느끼는 슬픔의 크기도 커진다. 명백한 부정의다.
내 상황을 전해 들은 동료 선생님께서는 눈물을 보이셨다. 그리고 다음 날, 하루 동안 열심히 수집한 ‘림프종’에 관한 정보를 나에게 전해 주셨다. 어느 병원 어떤 교수님이 ‘림프종’의 최고 권위자이신지부터 그분께서 최근 어느 병원으로 이직했는지까지 아낌없이 나눠 주셨다. 학교는 걱정하지 말라고, 치료에만 집중하라고, 젊으니까 금방 나을 것이라고. 격려와 위로의 말씀도 해주셨다. 눈물이 터져 나올까 봐 짧게 대답했다.
“설마 죽겠어요? 출근 안 하고 좋죠.”
친구들에겐 알리지 않을까도 생각했다. 좋은 일도 아니니까. 아무도 모르게 치료를 받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다시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친구들과 했던 약속이 있었다. ‘다음 주에 같이 술 마시자.’, ‘여름에 같이 락 페스티벌을 가자.’, ‘가을에 같이 하프 마라톤 대회를 나가자.’. 약속도 지키지 못하게 된 마당에 거짓말까지 하긴 싫었다. 그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암 걸렸다."
메시지를 확인한 친구들 반응은 대체로 비슷했다.
“아니, x발.”
“x바꺼. 조져버려.”
“좀만 버텨봐 ㅅㅂ 내가 항암제 연구해 봄.”
“롤도 안 하는 자식이 도대체 왜 암에 걸려.”
말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육두문자가 큰 힘이 되었다.
마지막 난관이 남았다. 이제 부모님께 말씀드릴 차례다.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미루고 미루다가 결심했다. 암이 어느 곳에 얼마나 퍼졌는지 확인하는 PET-CT 검사 결과가 나오면 알려야겠다. 그런데 검사 결과가 나오기 하루 전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잘 지내고 있지?”
기가 막힌 타이밍에 온 안부 전화에 계획은 산산조각 났다. 우물쭈물하다가 사실대로 말했다.
“얼마 전에 목 아파서 병원 갔는데, 림프종이라네.. 혈액암 이래.”
아빠는 빠르게 이성을 붙잡은 듯했다. '빨리 발견해서 다행이다' , '좋게 생각해라', '아는 사람 중에서도 암에 걸린 사람들이 있는데 다 나아서 잘 지내고 있다' 같은 말을 해주었다.
“내일 얼마만큼 퍼졌는지 보는 검사 결과 나온대. 엄마한테는 그거 나오면 말하려고.”
“아, 엄마한테는 말 안 했구나. 그래. 그냥 전화 한 번 해봤는데, 꼭 그거 때문에 전화한 것처럼 돼버렸네.”
통화가 끝난 뒤, 30분쯤 뒤에 아빠에게 카톡이 왔다.
‘절에 왔다’
함께 온 사진엔 ‘완쾌’라고 적힌 촛불이 타고 있었다.
다음 날 PET-CT 검사 결과가 나왔다. 교수님께서는 다행히도 암이 많이 퍼지진 않았다고 하셨다. 아직 어떤 종류의 림프종인지 확정되지 않아서 추가 검사가 필요하다고도 했다.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미만성거대 B세포림프종’이라는 상대적으로 좀 나은 녀석과 ‘버킷림프종’이라는 조금 더 악독한 놈. 정확한 결과는 또 2~3주 뒤쯤 나온다고 하셨다. 암세포가 너무 퍼지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위안이 되었다. 엄마한테 말할 용기가 조금 더 생겼다.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울리는 순간, 엄마에게 할 말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엄마, 나 목 아파서 병원 갔더니, 림프종이래. 암인데 치료하면 된대. 근데 학교는 조금 쉬어야 될 것 같아.’
그때 엄마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응. 비둘기야. 병원 갔다 왔어?”
엄마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빠가 말했나 보다.
“괜찮아. 걱정하지 말고, 엄마가 보니까 젊은 사람들은 다 낫더라. 혹시 입원할 때 불편하면 말해. S(아내)는 회사 가니까 엄마가 갈게. S(아내) 좀 바꿔줘.”
평소보다 과하게 밝은 엄마의 목소리에 눈물이 터졌다. 아내에게 휴대폰을 넘기고 조금 더 울었다.
엄마, 아빠 두 분 모두 슬픔은 잠시 접어두고,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나를 돕고 있었다. 엄마, 아빠는 내 생각보다 강했다. 역시 삶의 짬은 무시할 수 없다. 두 분이 스스로를 원망하시지만 않으면 좋겠다. 그들을 위해서 꼭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