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것은 승리뿐
전쟁에선 적을 물리치기 위해 총공세를 가해야 한다. 적만 쏙쏙 골라서 죽이면 참 좋겠지만, 불가능하다. 필요하다면 우리 땅에 대규모 폭격도 퍼부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인프라가 파괴되고 국토가 황폐화된다. 이겨도 이긴 게 아니다. 그래서 전쟁은 막아야 한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전쟁이라면, 반드시 이겨야 한다.
암이 나에게 선전 포고를 했다. 그 자식들만 쏙쏙 골라서 죽이면 정말 좋겠지만, 역시나 쉽지 않다. 암세포를 죽이는 과정에서 내 몸의 정상적인 세포도 파괴된다. 몸이 본래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하지 못한다. 그로 인해 다양한 부작용이 나타난다. 많은 환자들은 항암 치료 부작용으로 고통받는다.
어차피 겪게 될 부작용을 애써 찾아보진 않았다. 먼저 알아서 좋을 것도 없고, 사람마다 겪는 부작용이 달라서 별 의미도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겪는 부작용이 있었다. 구토와 울렁거림이다.
음식만 봐도 울렁거려서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분들이 많았다. 항암 치료 중에 음식을 거의 먹지 못해서 체중이 10kg이나 빠졌다는 분도 있었다. 항암 치료에선 체력이 가장 중요하다. 체력은 결국 음식에서 나온다. 잘 먹지 못하니 체력이 나빠지고, 체력이 나빠지니 항암 치료가 더욱 고통스러워지는 악순환에 빠지는 환자들이 많다. 항암 치료까지 남은 시간은 일주일. 내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해졌다.
먹자. 맛있는 음식을 최대한 많이 먹자.
아내와 함께 한우도 먹고, 회도 먹고, 삼겹살도 먹고, 양꼬치도 먹고. 먹고 싶은 음식들을 다 먹었다. 고맙게도 여기저기서 나를 가엽게 여겨 친구들이 밥을 사주러 왔다. 환자는 보양식을 먹어야 하는 편견이 있는지, 삼계탕을 사주고, 장어를 사주고, 샤브샤브를 사줬다. 이런 좋은 음식들에 술이 빠지니 약간 어색하고 아쉽기도 했지만, 맨 정신으로 느끼는 음식 맛도 나쁘지 않았다.
입원하기 전에 또 한 가지 할 일이 있었다. 그나마 가장 건강한 모습일 때, 부모님을 만나고 싶었다. 고향에 내려가서 또다시 먹고 또 먹었다. 참치 회를 더 이상 생각이 안 날 정도로 원 없이 먹었다. 다음 날엔 오리 백숙 한 마리를 먹었다. 이 정도 먹고 나니,
암세포와의 전쟁에서 질 자신이 없었다.
입원 하루 전, 아내는 갑자기 작은 캐리어를 꺼냈다. 처음 본 캐리어였다.
“이거 어디서 났어?”
“뭘 어디서 나 샀지.”
“뭐 하러?”
“뭐 하러 사긴 뭘 뭐 하러 사. 너 입원하러 가야 되니까 샀지.”
“아, 나는 내 가방 메고 가려고 했는데.”
“첫 항암 땐 2박 3일 정도는 입원한다는 데, 무슨 저 가방 하나만 가져가.”
아내는 휴대폰에 적어둔 체크리스트를 살폈다. 림프종 카페에 드나들며 입원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적어 둔 듯했다. 일회용 칫솔, 일회용 수건, 일회용 샤워 타월, 일회용 속옷까지 새로 산 물품들도 많았다. 입원에 필요한 게 저렇게 많구나.. 아내가 없었으면, 나는 책가방 하나 달랑 메고 가서 온갖 불편을 겪을 뻔했다.
아내가 준비한 물품들을 담다 보니, 캐리어도 가득 찼다. 얼마 전 친구가 선물해 준 인형도 캐리어에 달았다. 여행 가는 기분이 들었다.
드디어, 모든 전투 준비는 끝났다.
나는 반드시 이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