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없음의 쓸모있음

드디어 내 가치를 찾았다

by 비둘기

대학생 때 유시민 작가의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을 읽었다. 흐릿한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한 구절이 있다.

‘폐 끼치지 말고 살자.’ 이것이 내 좌우명이다.
남들에게, 사회에 폐를 끼치지 않고 살려면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 유시민>

이날부터 ‘내 쓸모는 무엇일까?’ 고민했다.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해줄 만한 말빨도 없고, 뛰어난 운동 능력도 없고, 간단한 서빙조차 어설프기 짝이 없다. 친구들과 고기를 먹을 때도, 친구들은 내가 고기 집게를 잡으면 불안해 했다.

거참, 어지간히 쓸모 없는 사람이었다.



그나마 좀 나았던 게 공부였다. 그것도 빼어나진 않았지만, 다른 것보단 조금 나았다. 운 좋게도 대한민국은 간단한 서빙도, 고기 뒤집기도 못하는 사람도, 시험보는 기술만 조금 있으면 사람 취급을 해주었다. 입시를 거쳐 교육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고, 임용 시험을 보고 교사가 될 수 있었다. 교사가 되고 나니 드디어 나도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암 진단을 받고, 유일한 쓸모가 사라졌다. 인수인계조차 제대로 못하고 급하게 휴직을 했다. 처리하던 일을 마무리 하지 못했고, 맡았던 반도 끝까지 책임지지 못했다. 집에선 가장의 책임을 모두 아내에게 떠넘기게 되었다. 돈을 벌지 못하고, 오히려 벌어 둔 돈도 까먹고 있다.

거참, 여러모로 폐를 끼치는 사람이 되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치는 존재가 되었다. 부모님은 매일 같이 전화해서 내 안부를 물었다. 아내는 병원 갈 때마다 나를 태워줬다. 소식을 들은 친구들이 하나둘 먼 곳에서 밥을 사주겠다며 찾아왔다. 쓸모 없는 사람이 되자, 나를 쓸모로 평가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 쓸모가 아니라 내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이들. 이들이 나를 '쓸모 없지만 가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쓸모없는 사람이 되고 나서야 내 가치를 찾다니..

참 우습다.



쓸모없는 짓도 하나씩 늘려나갔다. ‘이게 나한테 도움이 될까?’, ‘이걸 내가 언젠가 써먹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지 않고, 그냥 하고 싶은 일을 했다. 레고를 조립하고, 하루 종일 시트콤을 보고, 한자 공부도 시작했다. 나에게 뭐하나 도움될 것 없는 이런 한심한 짓들이.

이토록 즐거울 줄 몰랐다.



장자가 말한 ‘쓸모없음의 쓸모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쓸모없음을 알아야 비로소 쓸모에 관해 함께 말할 수 있네. 세상이 넓고도 크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사람에게 쓸모가 있는 것은 발을 디딜 만큼의 땅이네. 그렇다면 발을 디디고 있는 땅만을 남겨두고 나머지 땅을 모조리 파고 들어가 황천에까지 이른다면, 그 밟고 있는 땅이 사람에게 쓸모가 있겠는가?”

keyword
월, 화, 수, 목, 금 연재
이전 12화서울, 서울,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