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를 하다

재밌다!

by 비둘기

항암을 이겨내려면 체력이 중요하다. 그 체력이 도대체 무엇일까? 내가 아는 체력을 먼저 떠올려 봤다. 초등학교 체육 교과서에서는 체력을 두 가지로 분류한다.

건강 체력과 운동 체력.



건강 체력에는 근력, 근지구력, 심폐지구력, 유연성이 있다. 아무래도 항암에 필요한 체력이 이걸 말하진 않는 것 같다. 물론 근육이 원래 많았다면 도움이 되겠지만, 지금 근력과 근지구력을 기르겠다며 헬스장에 갔다간 변사체는 아니더라도 ‘변 싼 채’로 발견되고 말 것이다.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운동은 천천히 걷기 뿐이다.



운동 체력을 살펴보자. 운동 체력은 순간적으로 힘을 내는 순발력, 순간적으로 방향을 바꾸는 민첩성, 눈과 손의 협동 능력인 협응성, 우리 몸의 균형을 잡는 능력인 평형성이 있다. 이건 더욱더 항암과는 관련이 없어 보인다.



사실 ‘항암을 이겨내려면 체력이 중요해!’에서 체력은 영양이다. 즉, ‘항암을 이겨내려면 잘 먹어야 해!’라는 말과 같다. 독한 항암제에 만신창이가 된 몸은 충분한 영양이 필요하다. 안타깝게도 항암제는 식욕도 떨어뜨린다. 암 병동엔 나온 식사를 손도 대지 못하는 분들이 많다. 화장실에선 빈번하게 누군가가 구토하는 소리가 들린다.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는 몸에 충분한 영양소까지 공급할 수 없다 보니 점점 더 힘들어진다.

먹어야 산다.

다행히 몇 안 되는 내가 잘하는 일이다.



10년 넘게 먹지 않았던 아침밥도 다시 먹기 시작했다. 아내가 고생이다. 아침밥을 차리기 위해 새벽 6시부터 일어난다. 평소보다 30분이나 빠른 시간이다. 아내는 아침에 일어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다. 미라클 모닝처럼 쓸데없는 행동이 없다고 여긴다. 그런 사람이 이렇게 변했다. 내가 알아서 차려 먹는다는데도 도무지 믿지를 않는다. 심지어 아내는 아침밥을 먹지도 않는다. 오직 나를 위해 자기가 가장 싫어하는 행동을 기꺼이 한다.

이게 정말 미라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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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먹으며 찬찬히 생각해 봤다. 지금 우리 집이 그러니까.. 돈도 아내가 벌고, 아침밥도 아내가 하고, 청소도 아내가 하고, 저녁도 아내가 하는데..

도대체 나는 뭐 하는 사람인가?



집안의 가장 타이틀은 빼앗겼지만, 밥이나 축내는 식충이가 될 순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본다. 빨래를 돌리고, 분리수거를 하고, 음식물 쓰레기를 버린다. 빨래 건조대에서 빨래를 꺼내 하나하나 갠다. 밥을 먹고 혈당도 낮출 겸 청소기를 들고 이리저리 다녔다. 벌써 며칠 동안 내가 청소기를 돌렸는데, 아내는 전혀 모르고 있다. 잠들기 전 매일 같은 말을 한다.

“아 진짜, 이번 주말엔 청소기 좀 돌려야겠다.”

청소를 했는데 아무도 모른다면,

그건 청소를 한 것인가? 청소를 하지 않은 것인가?

굉장히 철학적이다.



철학적 청소를 마치고 잠시 유튜브 영상을 봤다. 성시경 씨의 새로운 영상이 올라왔다. ‘성천 막국수’ 스타일 수육 레시피였다. ‘성천 막국수’가 어딘지는 모르지만, 수육이 맛있어 보여서 끝까지 봤다. 그리고 결심했다.

‘오늘 저녁은 내가 해야겠다.’



아내에게 카톡을 보냈다.

“확 내가 저녁해 줘버려? 먹고픈 것 있니?”

아내는 뭐든 좋다고 했다. 어떤 요리를 할지 고민했다. 맛은 당연히 있어야 하고, 멋까지 있으면 좋겠는데. 그런 음식이 뭐가 있을까? 요리 유튜버들 영상을 한참을 봤다. 그중에 ‘육식맨’님의 바비큐 플래터가 눈에 들어왔다. 맛도 있고, 멋도 있었다. 이 요리는 통삼겹살을 110도 오븐에 3시간 동안 구워야 한다. 아내의 퇴근 시간은 3시간 정도 남았다. 지금 당장 시작해야 저녁 시간을 맞출 수 있다. 바로 정육점에 내려가 통삼겹살을 사고, 마트에서 닭다리살과 고수를 샀다.



통삽겹살을 오븐에 넣고 나니 딱히 할 게 없었다. 기다리는 동안 <슬램덩크>를 꺼내 읽었다. 정대만의 한 마디가 내가 용기를 준다.

“정대만… 이런 힘든 상황에서야 말로 난 더욱 불타오르는 녀석이었다…!!”



신나게 읽다 보니 아내가 집에 왔다. 고기도 다 익었다. 나머지 요리를 빠르게 하고, 접시에 멋지게 옮겨 담았다. 비주얼이 끝내준다. 다행히 맛도 좋다. 아내도 좋아한다. 밥만 축내다가 오랜만에 밥값을 했다. 게다가 아주 재미가 있다. 이런 재미난 일은 한 번으로 끝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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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엔 스페어립 바비큐를 해봐야겠다.



2025년 항암 치료를 마친 후 완전관해 되었습니다.
현재는 정기 검진을 받으며 회복 중입니다.
이제야 지난 시간을 돌아볼 여유가 생겨투병기를 남깁니다.
제 투병기가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길 바랍니다.

#작가의 말

이제 설 연휴가 끝났습니다.

설 연휴동안 다들 즐겁게 보내셨나요?

연휴가 길어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가

만만치 않을 것 같네요.

잘 이겨내시길 바랍니다.

오늘, 내일만 지나면 또 주말입니다!


저는 설 연휴 마지막날

브런치에서 한 통의 메일을 받았습니다.

제가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가 됐더라고요.

프로필에 들어가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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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마크가 하나 붙었습니다.

별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습니다.


오늘 새벽에 알람도 없이 잠시 깼는데,

마침 한국 쇼트트랙 계주 결승을 하는 시간이더라고요.

그냥 더 잘까 고민하다가 나가서 봤더니

대한민국 대표팀이 계주 금메달을 땄네요.


덕분에 아주 기분 좋은 하루입니다.

여러분들도 오늘 하루 잘 이겨내시고,

행복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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