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머리가 되었다.

그리고 더 강해졌지

by 비둘기

아내와 결혼 전에 했던 말이 있다. 이성의 외모에 관한 이야기였다. 나는 이성을 볼 때 외모가 1순위라고 했다. 아내는 의외로 소박했다. 보통만 되면 충분하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안심했다.

‘나는 당연히 보통 이상이지.’

그런데 아내는 한 가지 조건을 추가했다.

“대머리는 절대 안 돼. 대머리랑은 결혼 못해.”

나는 머리숱이 풍성했다. 하나가 빠지면 두 개가 나는 사람이었다. 대머리는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암 환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대머리다. 탈모는 항암 치료의 대표적 부작용이다. 입원을 했을 때 간호사 님께서도 말씀하셨다.

“머리는 아마 다 빠질 겁니다. 몸에 있는 모든 털 다 빠질 거예요.”

대머리 시한부 선고를 받고, 난 대머리의 삶을 받아들였다.



매일 머리를 감을 때마다 내 머리가 빠지는지 확인했다. 머리가 아직 남아 있으면 안심이 되었다. 항암 치료를 마친 지 일주일이 지나도 머리가 빠지지 않자 근거 없는 희망이 생겼다.

‘혹시 내게 항암 치료를 받고도 머리가 빠지지 않는 돌연변이 유전자가 있는 건 아닐까?’


아니었다.



자고 일어나면 베개 주변에 빠진 머리카락이 평소보다 많았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샤워를 하기 전에 거울을 한번 바라봤다. 조각 같았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샤워실로 들어갔다. 물을 틀고 샴푸를 하는데, 양손에 머리카락이 한가득 뽑혀 나왔다. 물로 샴푸를 씻어내니, 머리카락이 땅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배수구는 순식간에 막혔고, 물 바다가 되었다. 공포 영화가 따로 없었다.



충격을 느끼며 샤워실을 빠져나왔다. 세면대를 잡고 잠시 심호흡을 했다.

'괜찮아. 이렇게 될 거 이미 알고 있었잖아. 대머리로 사는 게 뭐 어때서.'

마음을 가다듬고 고개를 들었다. 거울을 보고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조각 같던 남자는 사라지고, 골룸이 서 있었다.



머리를 털면 머리가 한 움큼 떨어졌다. 걸어만 다녀도 머리카락이 바닥에 흔적을 남겼다. 아내에게 사진과 함께 카톡을 보냈다.

“나 골룸 됐다.”

-ㅋㅋㅋㅋㅋㅋㅋ 엄청나게 빠졌네. 머리는 금방 다시 난대. 걱정하지 마.

“근데 화장실이 난리 났는데..”

-비닐봉지 하나 가져가서 물티슈로 살살 쓸어 담아.

“머리가 걸어 다니기만 해도 떨어져. 헨젤과 그레텔이야.”

-열받으면 오늘 확 밀어버릴까?

“그러자.”

그날 오후 아내와 함께 가발샵에 갔다. 머리를 밀고 가발도 하나 맞췄다. 안경을 벗고 있어서 잘 몰랐는데, 집에 와서 보니 가발이 너무 촌스러웠다. 의외로 대머리는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다.



대머리가 되어 집에 돌아오는데, 아내의 말이 떠올랐다.

‘대머리는 절대 안 돼. 대머리랑은 결혼 못해.’

영락없는 사기 결혼이었다. 나는 기도했다.

‘아내가 그 말을 기억 못 하게 해 주세요.’

대머리가 된 뒤 며칠이 지나도록 아내는 아무 말도 없었다. 아내는 기억을 못 하는 게 분명하다.

참 다행이다.



그런데, 어느 날 TV를 보다가 아내가 말했다.

“머리가 완전 문어네.”

나는 손가락으로 8개의 문어 다리를 만들어 얼굴에 붙여주었다. ‘이렇게 웃긴 암 환자는 없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혼자서 뿌듯해하는데, 아내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내가 대머리랑은 결혼 못한다고 해서 벌 받았나..

아내가 잊은 게 아니었다니, 이것 참 큰일이다.



대머리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머리를 감는 시간도 절약되고, 샴푸도 필요 없다. 폼클렌징 하나면 세수와 머리 감기를 동시에 할 수 있다. 머리를 말릴 필요도 없다. 가장 큰 장점은 강해 보인다는 것이다. 이토록 내가 강해보인 적은 없었다. 거울을 보면 무엇이든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길에서 담배를 피우는 귀염둥이 학생들도 내가 모자를 벗으면 재빨리 담배를 끈다. 이런 험상궂은 외모로 암세포 하나를 못 이겨낸다는 건 도무지 말이 안 된다.



나는 대머리가 되었다.

그리고 더 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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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항암 치료를 마친 후 완전관해 되었습니다.
현재는 정기 검진을 받으며 회복 중입니다.
이제야 지난 시간을 돌아볼 여유가 생겨 투병기를 남깁니다.
제 투병기가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길 바랍니다.

#작가의 말

이 글을 쓰면서

머리가 빠진 그날을 다시 떠올려봤습니다.

그날 가족, 아내, 친구들과 나눴던 카톡들을

다시 한번 읽어봤습니다.


갑작스럽게 골룸이 되어버려

충격은 받았지만,

그 사진들을 친구들에게도 나누며

즐겁게 이겨냈던 모습이 남아 있네요.


아빠는 '뉴진스님', '홍석천' 등

다양한 대머리 연예인의 사진을 보내며

저와 닮았다고 했습니다.

대머리인 것 말고는 전혀 닮은 점이 없는데,

머리가 그 정도로 사람에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잠시나마 온몸의 털과 눈썹까지도

모두 사라진 채로 살았는데,

지금은 다시 머리가 자라고 있습니다.

길이는 길지 않은데,

뭔가 지저분하게 자라서

한 달 전엔 머리를 한번 깎았습니다.


사라졌던 머리가 자라나고,

매서운 추위가 조금씩 꺾이는 걸 보면

결국 모든 일은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 같습니다.

오늘만 지나면 또 주말이네요.

모두들 행복한 금요일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슬픔이 그대 삶으로 밀려와 마음을 흔들고
소중한 것들을 쓸어가 버릴 때
그대 가슴에 대고 말하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랜터 윌슨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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