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프가 임신 20주차가 되어 정밀 초음파를 찍었다. 기존에 봤던 초음파는 머리, 몸통, 다리 정도의 큼직한 신체 구조만 봤다면 정밀 초음파는 좌뇌와 우뇌의 크기, 손가락과 발가락의 개수, 심장이 2심방과 2심실로 잘 구분되어 있는지, 분리막 상태는 괜찮은지. 이런 것들을 좀 더 세밀하게 관찰한다. 다행히 또치는 큰 이상 없이 무럭무럭 잘 자라나고 있었다. 다만 하나 걱정되는 게 있었는데 바로 구순구개열이다. 살면서 이 단어를 실제로 뱉어 보거나 종잇장에 써본 적도 없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일종의 장애이다.
아직도 구순구개열이 무슨 질환인지 정확히 몰라서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윗입술이 갈라지는 것은 구순열, 입천장이 갈라지는 것은 구개열이라고 한다. 임신 중 입이 생성될 때 양쪽에서 살이 차올라야 하는데 그 부분이 메워지지 않은 상태로 태어나면 입술이 찢어진 것처럼 보인다. 이를 구순열이라고 한다. 선천적인 기형이고 10,000명 중에 4명 정도의 확률이라고 한다.
이 흉터가 선천적인 질환이었다는 걸 성인이 돼서야 알았다. 엄마, 아빠는 그 사실을 오랫동안 숨겨왔고 나는 알지 못했다. 부모님께 말씀은 못 드렸지만 이 흉터를 놀리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때는 나도 어렸을 때라 마음의 상처가 되었지만, 그 친구들은 그렇게 심각한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걔네들이 나의 흉터를 지켜본 부모님의 심정을 이해한다면 그렇게 놀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도 그 심정은 이해할 수 없다. 막 태어난 아이의 입술이 벌어져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의 심정.
아빠는 내가 3살 때쯤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서 난 상처라고 말씀하셨다. 나도 기억이 없으니까 누군가 이 상처를 물어보면 항상 똑같이 이야기했다. 부모님에게는 이 상처가 항상 가슴의 응어리처럼 남아 있었고 중학교 때는 성형외과에 가서 비싼 돈을 내고 상처 제거 수술을 받았다. 엄마, 아빠가 나를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 난 상처라 미안한 마음이 크신가 보다, 라고만 생각했다. 지금도 조금 티가 나긴 하지만 사는데 큰 지장은 없다.
이 상처가 선천적인 질환임을 알게 된 건, 입대 신체검사를 받으면서였다. 대한민국 성인 남성이라면 무조건 거쳐야 하는 신체검사. 건강에 이상은 없고 장기간의 군 생활 동안 악화될 만한 질환은 없는지, 군 생활과 문화에 잘 적응할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을 본다. 신체검사를 통해 등급을 나누고 그 등급에 따라 군인, 사회복무요원, 면제 등이 결정된다.
나 때는 군인들에게 나라사랑 카드가 발급되고 그걸로 1번부터 순차적으로 카드를 찍으면서 검사를 받았는데 한 14번쯤 이동했을 때, 아마 청각 테스트였나. 검사를 마치고 일어나는데 한 검사원이 갑자기 다시 앉아보라고 하면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 아저씨도 내 흉터에 대해 물었다.
"어디서 생긴 흉터예요?"
"저도 기억이 없는데 어렸을 때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서 난 흉터로 알고 있습니다."
그 아저씨는 구순구개열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으셨고 그저 입술에 몇 mm 이상의 흉터가 있으면 4급 판정을 받을 수 있다고 하셨다. 정확히 신체검사 가이드 북에 그림으로 표현된 조항을 보여주셨다. 그리고는 나에게 선택권을 줬다. 1급을 받을지, 4급을 받을지. 나는 별생각 없이 4급을 달라고 했다. 그때 이 상처를 수술했던 진료 기록과 진단서를 떼오라고 하셨고, 아빠가 알려준 병원으로 가서 20여 년 전의 수술 내용을 들여다봤다. 진료 기록의 날짜는 내 생일 즈음이었다. 3살 때라면 1~2년 정도는 지났어야 하는데, 자세히 보니 내 질환 명이 날린 글씨로 적혀있었다. 구순열, 유전적 기형. 그때 처음 알았다. 이 상처는 다쳐서 생긴 게 아니다. 엄마의 자궁 속에서부터 가지고 있던 상처였다.
내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나는 아프게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수술을 하기 위해 인공호흡기를 달고, 마취를 하고, 혹시나 발버둥 치지 않기 위해 몸을 묶었다고 한다. 그 갓난아이를 말이다. 엄마, 아빠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으셨다. 그렇게 태어난 나에게 너무 미안하셨나 보다.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가끔 내가 뭘 놓고 오거나 건망증을 보이면 태어날 때 마취를 많이 해서 그런 게 아닌가 하며 마음 아파하셨다.
나는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었다. 하지만 또치가 생기면서 처음으로 이 흉터가 두렵기 시작했다. 혹시나 이 질환이 또치에게도 유전되면 어떡하지. 정밀 초음파를 하면서 마음을 졸이며 의사 선생님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나하나 순서대로 또치의 머리, 콧대, 그리고 인중까지 보는데 다행히 큰 이상이 없었다. 아주 선명한 인중 자국이 남아 있었다.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태어나자마자 수술대에 눕거나, 앞으로 커가면서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정말 다행이다.
이 소식을 부모님에게 전했다. 두 분 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눈물을 흘리셨다. 친할머니 돌아가실 때 처음 봤던 아버지의 눈물이 수화기 넘어로도 들려왔다. 나보다 더 걱정되셨을 것이다. 난 그 기분을 모르지만 부모님은 나로 인해 경험을 해보셨으니까. 아버지는 나에게 같은 슬픔을 물려주지 않아서 다행이고, 또 또치가 건강하게 태어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하셨다.
그날 저녁, 혜련이와 함께 침대에 누워 오늘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어렸을 때 기억을 되새겨보면, 엄마는 나에게 너무 관심이 많았다. 그것은 애착을 넘어 집착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나의 행동과 선택 하나하나에 너무 깊이 개입을 하려고 하셨고, 아빠는 엄마가 나를 너무 사랑해서 그렇다고 하셨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나를 사랑하면 그래도 되는지. 하지만 부모님은 아프게 태어난 나에게 미안해서, 그럼에도 더 건강하고 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부모님의 사랑, 그 기저에는 결코 해소될 수 없는 미안함이 깔려 있었다. 그런 마음으로 내게 상처가 될까 봐 20년 동안 그 사실을 숨기고 계셨던 것이다. 그날 밤, 부모님의 마음이 아주 조금 이해가 되는 것 같아서,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