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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학청년 Aug 10. 2016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1/3)

언어가 지닌 숙명적인 마성

#공릉동 #커피니 #coffeen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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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읽고 싯다르타를 읽었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읽으며 그가 생각하는 육체와 이성, 사랑과 본능, 죽음과 쾌락 등이 나에게도 하나의 균열로써 내 두 다리를 지탱하는 지면 사이에 쐐기 형태로 박혀 있음을 인식하였다. 글이라는 것은 그 균열을 메꾸는 (치료제라기보다)보형물이라고 생각했는데 헤세 또한 글로써 그 자신의 균열을 그득그득 채우고 있었으며 그 깊이나 크기는 나보다 더 깊고 심오했다. 그것으로부터 어떤 전우애, 동질감 같은 것을 느꼈다.



말이란 신비로운 참뜻을 훼손해 버리는 법일세. 
무슨 일이든 일단 말로 표현하게 되면 그 즉시 본래의 참 뜻이 언제나 약간
달라져 버리게 되고, 약간 불순물이 섞여 변조되어 버리고
약간 어리석게 되어버린다는 거야.



말이라는 것을 왜 할까. 글이라는 것을 왜 쓸까. 전과는 달리 A4용지 한 장 분량의 글을 쓰려고 하면 그것을 생각하는 순간부터 지루한 마음이 든다. 싯다르타라는 책을 읽고 서평을 써야겠다는 마음, 그에게 공감하고 빠져들었던 순간을 표현해야겠다는 마음이 들면 기쁨에 차면서도 그것을 글로 써야지라는 생각이 그 기쁨을 울타리 안에 가둔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그림이나 음악으로 표현, 기록하는 방법을 모르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런 식으로 글을 쓰는 수 밖에 없다. 전달을 해야겠다는 마음이나 목적이 없이 쓰여진 글이, 누구에게 보여질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쓴 글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림을 그리듯 글을 쓰는 것이다.

 

우리가 쓰는 대부분의 글은 감정 표현과 사실 기록의 적절한 배합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것을 읽는 사람은 감정이나 사실을 전달 받는다고 생각했지. 사실이라는 것은 순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지금 커피를 마신다는 사실을 글자로써 당신에게 전달했고 당신은 전달 받았잖아. (그것은 믿음일 뿐이지만) 


그러나, 정확히는 우리는 사실을 주고 받을 수 없다. 사실이나 팩트라는 것은 일종의 이동수단이고 우리는 감정을 주고 받는 것이다. 내가 커피를 마신다는 사실, 방학을 했다는 사실, 교통사고가 났다는 사실을 당신에게 전달하려고 하면 분명 당신은 그것에 감정을 담아서 받아들일 것이다. 내가 커피를 마시는 장면을 그려보려고 당신도 모르게 노력을 할 것이고 내가 누군지 모른다면 당신이 커피를 마셨던 기억이 무의식 속에 떠오를 것이며 그 날의 커피향과 카페의 분위기 또한 그 속에 녹아 있을 것이다. 뉴스만 보아도 어떤 감정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그것을 본 후에 깨닫는다. 


그래서 결국 리는 글을 통해 감정을 공유할 뿐이다. 그렇다고 그 작가와 독자의 감정이 일치하리란 법도 없다. 작가는 글 속에 감정을 담으려고 노력할 것이고 내 생각엔 그것이 독자가 느끼길 바라는 감정이 아니라 작가 자신이 격하게 느꼈던 감정일 것이며 그 감정이 쌓이고 쌓여서 글이 됐을 것이다. 감정을 글로 써버리는 이유는 그것을 추스르기 위해서이다. 이 벅찬 슬픔, 이 벅찬 고통, 이 벅찬 기쁨, 환락, 피로. 너무 벅차서 가슴이 터질 것만 같고 머리가 지끈지끈하며 우주의 가장 깊은 어둠 속에 빠져들 것만 같은 고독 속에서. 우리는 글을 쓴다.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자위하기 위해. 


글을 쓰고 감정을 표현하고 다짐을 하고 미래를 계획하면서 감정을 추스르는 것이다. 나 같은 경우도 그렇다. 내 글 속에 쓰여진 '~아닐까', '~것 같다' 라고 쓰여진 말들은 무의미한 단어이지만 글자 그 자체로써는 문장의 마감재 역할을 잘 해준다. 그러한 막막함이나 알고자 하는 마음이 이런 단어 때문에, 글이 주는 안정감 때문에 흐릿해지고 사그라든다. 지금 쓰는 글에도 그러한 단어가 많을 것이고 그러한 글은 못쓰여진 글이라고 보긴 어렵지만 내겐 독이되는 글이다. 


유명한 자기계발자 토니 로빈스는 우리의 삶의 원동력이 감정이라고 한다. 나 또한 내가 행동하고 움직이는 것의 근원은 감정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사람마다 다를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있어서 그 감정들의 특징은 나를 우울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어떤 기쁨이나 환희, 충만감 이라기보다 열등감, 자괴감, 외로움 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들이 터질 것만 같을 때, 그 감정들이 들끓어 올라 가슴이 벅차고 마음이 끝없이 추락하고 침전에 침전에 침전에 침잠에 침잠에 침잠을 반복할 때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서, 추스르기 위해서 나는 글을 쓴다. 그렇게 감정은 사그라들고 삶의 원동력, 생명의 불꽃, 나의 외로움은 조금 식어간다. 마치 환락의 밤이, 살아있다는 것을 잊게 해주는 것 처럼.


그래서 글쟁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자위행위가 중독성이 있듯, 글을 쓰는 사람은 글을 계속 쓰게 된다. 헤르만 헤세도 박경리 할머니도 그러하고 나도 그렇다. 하지만 글쟁이가 되고 싶지는 않다. 움직이고 싶다. 삶의 소실점이 글 속에 있지 않길 바란다. 그것은 내 손바닥이나 발바닥이나 입술에 있어야 한다. 글을 쓰고 멈추어서는 안된다. 글로 자위하면 안된다. 글로 추스르면 안된다. 내게 쓰는 글은 사진과 같아야 하며, 남에게 쓰는 글은(지금 이 글과 같이) 그림과 같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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