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우 Oct 12. 2021

성냥

탈대로 다 타시오.

예전에 7,80년대 젊은 청춘들이 데이트할 때 드나들던 찻집의 테이블 위에는 재떨이와 성냥이 늘 있었다. 재떨이는 십이간지 그림이 그려져서 자기의 띠를 찾아 동전을 넣으면 그날의 운세가 돌돌 말린 종이로 톡 하니 나오는 것이었고 성냥은 ‘닭표’ 또는 ‘UN표’ 팔각 통 성냥이었다. 그저 할 일 없고 돈도 없는 연인들은 시원하거나 따듯한 다방에 죽치고 앉아 성냥통의 성냥개비를 이용한 수수께끼, 성냥 쌓아 올리기 등 온갖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오래 앉아있자면 가끔 오가는 레지의 눈치가 좀 보였지만.

집에서도 동생이랑 성냥통을 쏟아놓고 얼마나 재미나게 성냥개비 놀이를 했는지 모른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많던 성냥개비 퀴즈는 다 어디로 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당시 아는 친구의 집에 갔다가 성냥을 모아 정리해둔 것을 보고 놀랐던 적이 있다. 당시 업소마다 선전 목적으로 다들 전화번호가 인쇄된 작은 휴대용 성냥을 주었는데 그것을 죄다 모아뒀던 것이다. 국내는 물론 어떤 경로로 모았는지 외국 성냥까지 그 종류와 디자인이 하도 다양해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었다.      


부엌에서도 성냥은 필수품이었다. 아궁이에 불을 붙일 때도,  석유곤로를 쓰던 부엌에서도, 번개탄에 불을 붙여 꺼진 연탄을 살릴 때도 이 성냥이 없으면 안 되었으니까. 그뿐 아니라 간이 이쑤시개 역할까지 하던 이 성냥이 얼마 후 일회용 라이터의 등장 때문인지 어느덧 서서히 자취를 감춰버리고 말았다. 얼마 전에 아직도 우리나라에 단 한 곳 남아있다는 성냥공장 사장님 인터뷰를 TV서 봤는데 그 시절이 새삼스레 생각나서 감개가 무량했다. 그 시절 성냥 공장에 다니며 동생 학비를 댔던 수많은 우리의 누님들은 지금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사는지. 우리 집에 있던 이숙이 언니도 우리 집안이 기운 후 얼마간 우리 집에 더 있다가는 성냥공장에 일하러 간다고 떠나갔다. 그 언니가 공장에 다니며 가르쳤던 그 남동생들은 지금 그때 언니 수고를 알고나 있는지, 언니의 바람대로 출세해서 집안을 거두며 잘 지내고 있는지도 새삼 궁금하다.     


초등학교 적의 기억이다. 그 당시 집들이를 갈 때는 양초와 성냥이 주 선물이었는데 한 친구네 집의 자개장롱 위에 잔뜩 쌓인 양초와 성냥갑을 보며 부러웠다. 우리는 언제나 이사를 가서 저런 선물도 받아볼까 싶어서. 이 친구네는 수시로 이사를 다녔다보다 싶었다. 그 친구 엄마는 계 왕주를 많이 했는데 몸집도 얼굴도 후덕해서 금색 반짝이 저고리가 잘 어울렸다. 그 친구네 집에 갈 때마다 늘 그 애 엄마 계원들이 모여 놀고 있었고, 요리강습을 해서 냄비도 팔고 빵 기계도 팔고 하는 둥 늘 뭔가가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그 애 엄마 말솜씨가 좋고 상냥했던 것 못지않게 그 친구의 용돈 씀씀이도 헤펐다. 당시 우리에게 용돈이라면 심부름 값이나 세배 값 아니면 집에 오신 손님이 주시는 용돈이 거의 전부였는데 그 앤 달랐다. 늘 입에 주전부리를 달고 사는 그 애와 그 집이 좀 별나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애가 학교에 오지 않았다. 그 애네 대문도 굳게 잠겨 있었다. 그 애 엄마가 곗돈을 몽땅 떼어먹고 야반도주했다고 동네 아줌마들이 수군거렸다. 계획적으로 인심을 후하게 써서 동네 아줌마들 신임을 얻고, 계 왕주를 해서 곗돈을 끌어 모은 다음 밤중에 도망을 갔다는 것이다. 나는 사람의 감춰진 뒷모습에 혼란스러웠다. 알고 보니 전에 살던 곳에서도 그리 했고 몇 년 간격으로 부부가 그렇게 하는 전문 사기꾼이라고 했다. 그 친구의 자리는 전학생이 와서 채울 때까지 비어 있었고 그 애는 그 후로는 다시 볼 수 없었다. 

천장까지 가득 쌓여있던 닭표 성냥이랑 양초와 함께 그 친구네 커다란 자개장롱을 남몰래 그 밤에 어찌 옮겼을지 난 그게 오래도록 궁금했다.           

이전 17화 여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