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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우 Oct 23. 2021

여름


숨 막히게 더운 여름이다. 게다가 열대야까지 겹치니 숨 쉴 틈 없이 더위가 사람을 몰아 댄다.

전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은 여름이었다. 내게 여름의 이미지는 뜨거운 햇살만큼이나 풍성한 과일과 채소, 싱싱하고 화려한 색감의 온갖 꽃들, 울안에 유폐시켰던 자신을 아낌없이 밖으로 드러내는 소통의 계절, 모든 사람들이 산과 바다로 쏟아져 나와 서로 어울리는 계절 등등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각인된 이미지는 이미 그 시효가 한참이나 지나고 나서도 그럭저럭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나 얼마 전 내가 아파트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 여름은 후덥지근해서 밖보다는 안에 머무는 계절이자 사람 많은 곳은 피하고 싶은 계절이 되었다. 과일 역시 제철이 사라진 지 오래고 싱싱한 여름 꽃은 우리 집 꽃밭이 없어지고 공중에 뜬 건물의 한 칸을 차지하고 살면서는 먼 이야기가 되었다.     


무더운 여름, 갓 길어 올린 우물물에 탄 미숫가루 한두 사발로 더위를 견디노라면 기승을 부리던 해도 거욷하니 지며 서서히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한다. 바로 이때 내가 좋아하는 여름의 새로운 장이 열린다. 이 집 저 집 피기 시작한 분꽃 더미가 마당 한편에 곱고 마을 어귀 풀숲의 달맞이꽃이 노랗게 벙글기 시작할 때 말이다. 마당에 모깃불 더미를 준비하고 바람이 선선해진 평상 위에는 저녁상이 차려지고 지붕 위에는 박꽃이 하얀 저녁. 저녁상마저 물리고 나면 더웠던 하루도 거의 마감된다. 득달같이 달려드는 모기를 피해 마른풀 위에 생쑥을 올린 모깃불 연기가 서서히 매캐하니 마당에 퍼지면 어느새 어둠은 바짝 다가와 담 가장자리 아주까리 너른 잎이나 해바라기 꽃대 위로 별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난 동생과 함께 기어 다니는 반딧불이를 잡아 호박꽃 안에 넣고 꽃잎을 오므려 발간 꽃등을 만들어 놀고는 했다.     


밤이 깊어지면 여치나 찌르레기 같은 풀벌레의 노래는 더욱 청아해진다. 평상 위에서 어른들의 이야기는 더욱 나직나직해지고 꼿꼿한 삼베 이불을 덮고 누워 사위어가는 모깃불을 북돋우며 모기를 피했다. 이때 평상에 누워 바라보는 밤하늘은 보드라운 흑보라 빛 벨벳 빛깔이었다. 그 한복판으로 흰 냇물처럼 은하수가 흐르고 동생과 나는 우리가 아는 온갖 이야기를 떠올리며 시공간이 툭 트인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할머니에게 듣는 옛이야기가 배경이거나 푸른 하늘 은하수 노래처럼 대게는 슬프거나 아련한 이야기들이다. 가끔 유성이 길게 꼬리를 긋고 떨어지면 행여 놓칠세라 얼른 소원을 빌었다. 풀벌레 소리는 잔잔하고 그러다가 졸리면 그대로 스르르 단잠에 빠져들던 그 여름 밤들. 자장가처럼 들리던 먼 곳의 맹꽁이 소리까지. 이미 사라진 내 여름밤의 추억이자 이미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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