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더위도 견딜만했고 그저 나락이 실하게 익을 정도였다. 냉장고 없이도 우물에 수박이나 김칫독을 넣어두면 달고 시원하게 먹을 수 있었던 시절. 어쩌다 30도를 넘는 날이면 혹서라고 놀라던 때였다. 지금은 30도를 훌쩍 넘어 40도를 육박하니 지구 온난화에 따른 급격한 기후의 변화라는 게 실감 난다.
그때는 겨울도 삼한사온이 신통하게 맞아떨어지는 때라 여름도 온대지역의 여름답게 수시로 시원하게 소나기가 쏟아져서 하굣길에 무지개를 보며 집에 갈 때가 많았다. 3,4킬로는 족히 되는 길을 걸어서, 뙤약볕에 얼굴이 벌게져 집에 돌아와 씻고 나서 시원한 마루에 누워 있다 보면 어느새 잠이 들곤 했다. 거욷하니 해가 꺼끔할 무렵 일어나 놀러 나가거나 숙제한다고 호들갑을 떨기도 하며 여름을 보냈다.
어느 날이었다. 잠에서 깨어나 밖을 보니 쏟아지던 비는 막 개어가고 있었다. 왠지 집안은 허전해 보이고 각기 자기 일에 바쁜듯한데 문득 든 생각. '이런, 큰일이네. 늦잠 자서 지각하겠구나! 얼른 학교 가야지.'
옆에 있는 책가방을 서둘러 둘러메고 왜 안 깨웠냐고 동생에게 짜증을 내며 마구 뛰어나갔다. 부엌에서 나온 엄마가 뒤에서 뭐라고 하는 소리도 무시하고. 그러나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막상 학교에 당도해 보니 텅 빈 운동장뿐이었다. 이상해서 곰곰 생각해보니 아차! 학교 다녀와서 아직 저녁도 안 먹었구나 싶었다. 어이가 없어 속상하고 다리도 풀려 뻘쭘한데 눈치도 없이, 왜 학교에 다시 왔냐고 묻는 문방구집 친구의 말에 딱히 할 말도 없어 곤란하고. 터덜터덜 걸어서 집으로 가면서 식구들 웃음거리가 될게 뻔해서 풀이 죽었다.
마당 앞의 분꽃에게도 장독대 옆의 맨드라미나 족두리 꽃 보기에도 염치가 없었던 어렸을 적의 어느 여름 오후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