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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우 Oct 12. 2021

눈 온 날

조용하다 못해 적막하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흰 눈 속으로 죄다 흡수되어 버렸나 보다. 수묵화 같은 앞 숲의 풍경. 새마저도 너무 추운지 날지 않는다. 온 세상이 고요 속에 잠겨있다.

휴일, 모처럼의 강추위에다 대설주의보가 내려진 아침. 일찍 깬 잠 덕분에 창밖의 앞산 설경을 보며 느긋이 생각에 젖는다. 잠자리는 아직 따듯하고 폭신하다. 지나간 것은 다 아름답게 느껴지기 마련이라서인지 예전의 그 겨울이 지금 생각하면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비록 방 윗목의 걸레가 얼어붙을 만큼 웃풍이 센 집에다 부실한 의복이라 그 추위가 살을 에는 것이었을지라도.


겨울 아침에 일어나면 옷을 입기가 무섭게 세수를 하러 나갔다. 가끔은 창호문의 조각 유리 너머로 보이는 추위가 너무 을씨년스러워 따듯한 방 안에서 더 몽그작거리고도 싶지만 밖이 너무나도 궁금하니 재빠르게 움직인다. 밖의 수돗가에 이르는 길이랑 마당, 대문 밖은 정갈하니 이미 비질이 잘 되어있고 수돗가에는 들통에 뜨거운 물이 김을 내며 놓여있다. 전날보다 더 길어난 처마 밑의 고드름처럼 겨울 아침은 늘 나보다 한발 먼저 와 있었다. 우리 강아지는 눈밭을 뛰어다니며 마냥 신이 났다. 대야에다 뜨거운 물을 찬물과 섞어서 세수를 하고 나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리 집은 변두리 산동네라 집 뒤란으로는 대나무 숲이 있었다. 참새 녀석들은 눈 온 날에도 대숲에서 요리조리 몰려다니며 자발을 떨었다. 세수를 마치고 나서 온 세상이 눈 천지인 날, 허리를 굽혀 다리 사이로 경치를 보면 설경은 더욱더 휘황하고도 새롭게 보였다. 댓잎에 눈을 이고 낭창하니 휘어진 대나무들, 가끔씩 거기서 후드득 날아오르는 새떼들 때문에 낭창했던 댓가지가 흔들려서 더러는 눈을 덜어내기도 하는 모습들이 아득하니 몽환적이다. 이미 어른이 된 후에도 시골 살 때는 눈 오는 날 나가서 옆 대나무 숲을 그렇게 다리 사이로 바라보곤 했다. 물구나무서서 바라본 대나무 숲 설경은 예나 지금이나 늘 신선하고 경이롭다. 단지 시선의 높이를 낮췄을 뿐이건만.    

 

문고리가 쩍쩍 들러붙고 밥상을 부엌에서 방으로 옮기자면 상위에 놓인 동치미 보시기가 죽죽 미끄러지는 날도 밥을 먹기가 무섭게 학교에 가거나 방학이면 일단 밖으로 나갔다. 아이들은 배가 부르고 시간이 남으면 모여서 뭔가 재미난 놀이를 궁리해내기 마련이다. 자치기를 하건, 나이 먹기 놀이를 하건 아무런 도구 없이도 양지를 찾아다니며 잘 놀았다. 나무 작대기, 판판한 돌멩이 몇 개로도 아주 하루가 신났다.   

  

몸을 쓴다는 것, 몸을 움직이고 상상을 보태서 신나게 노는 것만큼 사람의 몸과 맘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 또 있을까 싶다. 가끔 땀 날만큼 걸어보는 것, 모처럼 운동에 몰입하거나 몸의 감각에 집중해보면 그 맛을 느낄 수 있다. 머리가 복잡할 때, 무거운 일이 나를 계속 짓누를 때, 세상이 의미 없고, 무력해 보일 때는 예전처럼 일단 몸을 써볼 일이다.      


지금은 일요일이니 이제 식구들 아침을 챙길 시간이다. 예전처럼 이런 날 거꾸로 바라볼 대숲이나 재잘대는 참새들은 없지만 할 일은 더 많다. 김 빠진 사이다처럼 늘 그렇듯 일상으로 다가오는 일 말이다. 몸을 쓰며 신나게 놀 일이나 흥이 날 일 따위는 좀체 없을 것이다. 안락한 일상이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나마 그런 무탈한 일상에 감사한다.     

눈이 온다고 해서 전처럼 막연한 그리움도 애틋할 일도 이젠 없지만 그래도 오늘같이 눈 손님이 찾아오신 날은 예전에 가슴 설레게 했던 묵은 시집이라도 들춰볼 일이다. 

폭설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천지가 조용하고 숙연해진 오늘 같은 날에 대한 예의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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