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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XA 매거진 Sep 23. 2019

'Doxa Vol.2 한켠' 맛보기

#2 DOXA가 담은 비평들

   DOXA는 한 호에 한 명의 작가를 다루는 문학비평 매거진이다. 우리는 작가의 인터뷰나 작품을 지면에 담을 뿐만 아니라, 작품을 읽고 해석하여 비평한 글 또한 담는다. 


   혹자는 '비평'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비평은 어렵고 머리 아픈 것, 어쩌면 재수 없고 건방진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작가가 숨겨 둔 의도를 문제 풀듯 맞히는 일, 작품의 흠결을 지적하고 평가하는 일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과연 그런 비평이 좋은 비평일까. DOXA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좋은 비평'에 필요한 것은 수준 높은 지식이나 교양이 아니다. 나름의 해석을 밀고 나갈 수 있는 자신감,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논리. 그리고 그 무엇보다 애정. 우리는 이 세 가지야말로 '좋은 비평'의 필수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지식과 교양이 아무리 충만하더라도, 애정 없는 시선은 빈곤하기 마련이므로.


   'DOXA vol.2 한켠'에는 그런 비평을 담았다. 다양한 시선에서의 독창적인 비평이 총 다섯 편 실렸다. 오늘 맛보기 기사에서는 이들 비평의 일부를 공개한다. 






그림자 탐정, 탈구된 존재

- 네오 탐정으로서 전일도 -


   반면 전일도는 오히려 추리를 ‘하지 않음’으로써 갈등의 축을 이루는 인물들을 있는 그대로 매개한다. 이로 인해 벌어지는 것은 ‘원래 벌어졌어야 할 다툼’들이다. 「헬로, 욜로(HELL-O-YOLO)」의 클라이맥스에서 보증금을 가지고 잠적했던 집주인 ‘진영’과 세입자 ‘혜진’, 그리고 진영의 남편인 ‘가윤이 아빠’에 전일도와 그의 조부까지 덤터기로 얽혀 벌어지는 엉망진창 설전이야말로 ‘원래 벌어졌어야 할 다툼’의 대표적인 예다. 발생했으나 다뤄지지 않았던 불만들, 남에게는 물론이고 스스로에게조차 털어놓지 못했던 감정들이 공공연히 공유되었을 때 비로소 사건은 해결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전일도가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을 다시 정의할 수 있다. 그는 사라진 사람을, 나아가 해결되지 않은 채 잊혔던 마음들을 찾아내는 탐정이다.


   〈그림자 탐정, 탈구된 존재〉는 '전일도 시리즈'를 다룬 비평이다. '전일도 시리즈'는 유쾌한 20대 고졸 여성이자 탐정인 전일도가 좌충우돌 끝에 의뢰를 해결해나가는 코지 미스터리 계열의 탐정 소설이다.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기발한 입담과, 진심을 다해 사건을 해결하는 전일도의 모습이 웃음과 감동을 함께 선사한다. 

   〈그림자 탐정, 탈구된 존재〉는 '전일도 시리즈'를 작금의 탐정소설이 보여주는 변화와 연관 지어 살펴 본다. 기존 탐정소설에서 탐정이 서사를 정의하고 설명하는 존재였다면, 최근 탐정소설에서 탐정은 철저히 서사의 일부가 되었으며 이에 따라 탐정이 내놓는 추리 역시 상대화되었다. 이제 사건 해결과 추리는 불가분의 관계가 아니다. 이 비평은 바로 이 지점에 주목한다. '전일도 시리즈'는 오히려 추리를 '하지 않음'으로써 사건을 해결한다. 누군가 '전일도 시리즈'를 두고 '과연 이것이 탐정소설이냐'라고 묻는다면, 이 비평은 하나의 즐거운 대답이 될 것이다.






이어폰밖에 없는데요

- 삶의 몰락을 대처하는 방식 -


  작가 한켠이 「아버님과 나와 죽음과」, 「블루레어」를 통해 만들어낸 세계는 마치 주머니 속의 이어폰을 연상케 한다. 그저 주머니 속에 잠시 넣어 놓았을 뿐이거늘, 어느새 꼬일 대로 꼬여버린 이어폰 같은 사람들과 그들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 우리의 눈앞에 성큼 다가와 있다. 다시 말해, 한켠은 ‘몰락’한 이후의 인물과 세계를 다룬다. 그가 그려낸 서사는 우리 주위에 널린 평범한 사람들이 우리가 알고 있던 익숙한 방식으로 무너지는 이야기이다. 몰락 이후, 그들의 삶의 양상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한편에서는 적적하고도 슬프지만 나름의 희망도 엿보이는 경우도 있는 반면, 반대쪽에선 용암처럼 들끓는 분노와 죽음충동만이 넘쳐나고 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은 몰락을 경험했다는 점에서 서로 유사한 배경을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각자의 감정과 시각은 상당히 이질적이다. 마치 각각 다른 작가가 쓴 것처럼 느껴지는 이 신선한 느낌은 아무래도 작가가 구사하는 ‘감정의 밀도’ 때문이 아닐까.


   〈이어폰밖에 없는데요〉는 「블루레어」와 「아버님과 나와 죽음과」를 다룬 비평이다. 「블루레어」는 학교폭력의 피해자였던 '최현기'의 이야기를, 「아버님과 나와 죽음과」는 남편을 잃은 후 시아버지와 동거하게 된 '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어폰밖에 없는데요〉는 두 소설이 '몰락 이후'를 다루는 방식을 살펴 본다. '최현기'와 '나'는 나름의 방식대로 몰락을 받아들이고 대처한다. 이는 비슷한 과정이면서도, 동시에 전혀 다른 과정이기도 하다. 이 비평은 「블루레어」에서 보여주었던 대처방식이 「아버님과 나와 죽음과」에서 비슷하게 재현되고 있으면서도, 한층 더 성숙해졌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 성숙의 비결은, 소설 바깥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경성의 한켠을 전유하기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를 중심으로 -


   경성은 미결된 시공간이다. 한국의 다른 시대, 다른 공간과 비교했을 때 그 시대의 서울을, 조선을 정체화하기란 특히 까다로운 일이다. 근대 산업 자본주의의 눈부신 발전을 경험하면서도, 그 경험의 온전한 주인은 될 수 없었다는 간극은 같은 시공간을 바라보는 분열된 시각을 낳는다. 그러니 경성에 대하여 쓴다는 것은 ‘이 미결된 균열을 어떻게 통합할 것인가?’라는 질문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이 질문과 응답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건, 그렇게 ‘통합된 경성’이라는 결과물이 아니다. 우리의 눈길은 오히려 결과물의 반대, 통합을 이루어낸 시선이 위치한 지점, 진보와 소외라는 간극이 엮여 드는 지점을 어디에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지를 향해야 한다. 이는 곧 ‘경성이 어떻게 이야기화(化)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일이다.


   〈경성의 한켠을 전유하기〉는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를 다룬 비평이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는 1940년대 경성을 배경으로 뱀파이어 여의사 ‘조이’와 조선인 생체실험자 ‘가이’의 사랑을 다룬 소설로, 괴물과 인간 그 사이의 존재들이 보여 주는 처절한 사랑을 담고 있다.

   〈경성의 한켠을 전유하기〉는 가장 먼저 우리 사회에서 '경성'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애매함을 지적한다. '경성'은 진보의 역사인가? 혹은 소외의 역사인가? 20세기 초 경성에는 두 면모가 모두 있었다. 그렇다면 진보와 소외라는 양극을 어떻게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낼 것인가? 경성을 다룬 모든 작품은 이 질문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비평은「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가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는지 분석한다.






시체를 뜯어먹는 사람


 ‘나’는 원청과 하청 누구도 책임지고 사과하지 않는 현실에 분노한다. ‘너’가 어떻게 죽었는지, 어떤 위험 물질이 있었는지 밝히지 않는 사람들은 사과하지 않아도 되는,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은 아주 길게 이어나갔다. “원청이 충분히 막을 수 있던 인재였다면서, 하청이 일을 게을리 했다면서, 초범이고, 고의가 아니라 과실이고, 반성하고 있고, 유가족과 합의해서” 이런 이유로 망치는 사과하지 않아도 됨을 선고하고 못을 박았다. 분노한 ‘나’는 “죄인들이 네 발밑에 엎드려 사과하게 할 거야.”라고 다짐한다. 그리고 ‘나’는 ‘너’의 시체를 뜯어먹는 사람이 된다. 한켠은 ‘과자로 지은 사람’을 통해 자신의 이름처럼 한켠에 치워진 사람에게 집중해본다. 사회의 아주 좁은 귀퉁이에 몰린 사람. 어디에 서야 할지 또 어떻게 애도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


   〈시체를 뜯어먹는 사람〉은 「과자로 만든 사람」을 다룬 비평이다. 「과자로 만든 사람」은 사망한 연인의 동거인이 겪는 경험을 담은 소설이다. 부부가 아니라는 이유로, 단지 혼인신고서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의 아픔은 증명할 수 없는 아픔이 된다.

   〈시체를 뜯어먹는 사람〉은 '나'가 겪는 아픔의 '증명할 수 없음'에 주목한다. 그것은 다층적이다. 한편으로는 행정적이면서, 한편으로는 존재론적이다. 비평은 장면과 장면 사이, 층과 층 사이로 짜인 소설의 면면을 들여다보며, 마침내 그것을 사회적인 층위의 이야기로 확대시킨다.






유령 질량 보존의 법칙에 대해서

- 한 유령이 떠나면 다른 유령이 온다 -


   홍염은 주적이라는 영혼의 한 귀퉁이를 잃어버리면서 영혼 질량 보존의 법칙에 따라 혁명이라는 또 다른 영혼을 빈 곳에 채워 넣는다. 홍염의 공산당 선언으로 요약되는 이 이야기는, 우리가 가진 영혼이 상처를 입어 한 귀퉁이가 떨어져나가는 일이, 곧 ‘또 다른 영혼이 들어설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일’임을 말하고 있다. 소설은, 그리고 작가는 인간 영혼이 끊임없이 상처 입어나가면서도 회복해내고 새로운 방향성을 만드는 존재임을 믿는다고 말하고 있다.


   〈유령 질량 보존의 법칙에 대해서〉는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를 다룬 비평이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는 1931년 평원 고무공장 여성 노동자들의 파업을 모티브로 하여, 고무공장 여성 노동자 '이담(홍염)'과 모르핀 중독 혁명가 '주적'의 애정전선과 투쟁전선을 그려낸 소설이다.

   〈유령 질량 보존의 법칙에 대해서〉는 우선 '이담'과 '주적'의 로맨스를 조명한다. 그러나 이는 위태롭다. 비평은 그들의 사랑을 위협하는 것이, 다름 아닌 식민지 조선의 현실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그러니만큼 '이담'과 '주적'이 노동투쟁을 모의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비평은, 이들의 사랑이 어떻게 혁명이 되는지를 짚어 보며, 그리하여 이담이 어떻게 완전한 혁명가로 거듭나게 되는지를 논한다.





비평문 전문은 'DOXA vol.2 한켠'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indiepub.kr/product/detail.html?product_no=1072&cate_no=25&display_grou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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