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숙명
동화 <어린 왕자>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어른들은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다. 그러나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다.”
타고난 줄 알았던 외로움을 다시 한번 맞닥뜨렸을 때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알아야 할 것 같았습니다.
이토록 유별나다는 이유로 감정 사용법을 잃었습니다.
우리가 그랬던 건 여전히 그 계절을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토록 유별났던 덕분에 저는 배우가 되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잘 사랑하시겠습니까?”
아무튼 내가 변한 건 이때부터였다. 쓰라리고 친숙했던 거리 위 당연했던 것들이 ‘ㅋㄹㄴ’ 세 음절로 휩쓸려 멀어지기 전 마지막 여름이었다. 몰려올 멈춤을 내다본 예언가처럼 평상시와 다르게 즉흥적인 면모가 넘실대던 과감의 계절. 급히 날아간 제주에서 버저비터로 등장한 쌍무지개에 숨겨왔던 소원을 몰래 빌었다. 자신마저 잊고서 지냈을 만큼, 어쩌면 잇따라 단념해왔을 오래된 소원. 마치 뇌에 밸 만큼 옹알거린 데뷔작의 첫 대사와 같았다. 만약 그때 아무것도 빌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해당 좌표를 따르는 성지순례는커녕 그날 그를 만나지 않았고, 배우가 되지도 않았고, 이 영화가 당신 앞에 존재할 일도 없었을까? 극 주인공들은 보통 필연처럼 위기에 직면하는데, 자기로부터 깊어지는 위기에 늘 탄식부터 곁들였다. “아니, 왜 저래?” 나도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인생 영화의 주인공이라는 걸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떤 극이든 완전한 결말을 맞이하기 전까지는 수없는 우연을 남겨둔 진행형인 이야기였고, 이 지금 선택에도 다음 장면의 룰렛은 쉴 새 없이 돌아갔다.
성인이 된 해부터 계속된 수년간의 자취생활은 왠지 모를 버릇들을 한 움큼 새겨놨다. 원래 이렇게 말이 많았었는지, 공허함을 채우려 재잘대는 기계가 된 건지 헷갈린다. 무제한 통화 요금제의 최대 수혜자는 도시 인파에 부대껴 온종일 혼자만의 공간을 더듬거리다가도 집 현관 스포트라이트를 내리쬐는 순간 깜빡 자취를 잃는다. 전날 남은 간편식을 데워낸 고기반찬. 꾸들꾸들해진 잡곡밥과 엄마산 묵은지. 물려가는 1인분의 저녁상을 차리고서 떠들썩한 타인의 음성을 끌어와 열 걸음 남짓한 어깨 뒷공간을 마저 채운다. 여느 날처럼 그런 날이었다. 샐녘에도 잠들지 못하고 회색빛 슈퍼싱글 침대를 상하좌우로 뒹굴어대던 나는 의경 시절 아빠(1년 선임)였던 영민 형이 깨어있음을 확인하고 다짜고짜 전화를 걸었다.
“형, 안자고 뭐 하는데?”
영민은 4년 전이나 지금이나 악의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순박한 형이었다. 전입 첫 야간 근무인 아들에게 던진 첫 인사가 소파에 발 올리고 눈 좀 붙이라는 아찔한 배려였던…. 번아웃이 빚어낸 일탈인 줄도 모르고 그런 형의 응답을 당연하다는 듯 판단해버렸다.
“나 다음 주에 제주도 갈 듯.”
“어? 갑자기? 누구랑?”
“나 혼자. 2박 3일 정도?”
“헐. 형은 역시 혼자서도 잘 다니네.”
차라리 다행이었을까. 따라나서야 할 것 같은 이상야릇한 기분에 일정이고 뭐고 합류 의사를 내비치고 다른 제안까지 거들었다.
“나도 데려갈래? 근데 3일만 있기에는 아까운데…”
“그래. 그러면?”
“…하루만 더? 어때? 좋지?”
모쪼록 우물쭈물한 듯 확고한 말투를 퍼붓고는 나흘짜리 생애 첫 무계획 여행을 떠났다. 서귀포에 있는 영화 <건축학개론> 촬영지를 기점으로 시계 침을 반대로 감듯이 카페 투어를 나섰고, 마지막 날 열 시경에 도착하였을 때는 복귀 항공권을 돌연 철회하였다.
“…아무래도 내일 가는 게 낫겠지?” 한참 동안 에메랄드빛 바다 먼 곳을 응시하던 형이 취한 방책에 놀림을 가동하다가 겨우 삼켰다.
“으흠! 그럼 숙박은 어떻게 할까?”
분명히 말해두지만, 전날 밤 곽지해변을 활보하던 영민의 숙취 때문은 아니었다. 숙명일 테다. 도대체 나는 왜 서쪽으로 넘어와서는 갑자기 일출을 보겠다고 외쳤을까.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나.
감사하게도 소수정예인 내 SNS를 팔로우해 준 애월 한 게스트하우스에 언젠가 한 번쯤은 방문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마침 패션 카페에서 추천 글을 봤었다는 형의 기억을 따라 검색해 보니 평점이 5점 만점에 4점 후반대. 새침한 고양이들이 사방을 배회한다는 후기도 종종 보였다. 그래서 의리를 지키러 내적 친분 가득한 게스트하우스로 곧장 핸들을 틀었다. 도착 즉시 반겨주던 ‘당신의 제주가 영화 같고 음악 같기를…’ 팻말 옆에서 악수부터 청하던 마리오 맵시 사장님께서는 당신은 누구냐며 의뭉스레 화답했지만 말이다.
“어? 누구시죠? 뭐, 지금부터 알아가면 되죠!”
오는 내내 형에게 낭만을 주입해왔던 터라 안면홍조가 살짝 올라올 뻔했지만, 최대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하지만 이 틈을 타고 훅 들어온 저녁 바비큐 파티 참석 여부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저희 특제 탁주도 있거든요. 한번 드셔보실래요?”
“네? …네.”
얼결에 들이킨 한 모금의 효과는 탁월했다. 운전대에 손댈 수 없었던 건 물론, 맛집을 찾으러 나서기에도 충분한 의지를 잃어버렸다. 그로써 목적이 배부른 술과 음식이었을 게스트하우스 파티는 나의 실시간 2kg 증량에 힘입어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이후 형과 나는 한 쌍의 2층 침대가 머리를 맞댄 정사각형 4인실에 짐을 정리하고서 코앞에 바다 품은 게스트하우스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겼다. 이때 우린 하룻밤을 함께 보낼 일일 룸메이트를 만났는데, 자기들 독사진만 양산해내는 모습에 오지랖을 가만둘 수가 없었다.
“혹시 괜찮으시면 제가 찍어드릴까요?”
친절 영업을 1순위로 내세워 연박을 유도하는 게스트하우스 직원인 양 나는 아득한 밤바다와 그 앞에 펼쳐진 1차선 아스팔트 도로를 중심으로 둘만의 애월을 선사했고, 우리는 가벼운 수다를 빌려 금세 말까지 놓았다. 여행 속 새로운 만남은 자기소개와 일정이 주된 이야기였다. 며칠간 쏘다닌 제주 곳곳의 명소들을 공유하였고, 그러다 본 그들의 스마트폰에는 조금 전 내가 담아낸 심령사진을 제외하고는 철저하게 서로가 모델인 독사진만이 가득했다. 이때였던 거 같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둘이 함께 담긴 낮 사진이 없는 게 아쉬워서, 마침 우리가 내일 오전 비행기니까 바다 일출을 배경으로 기막힌 찰나를 선물하겠다고 급작스러운 약속을 했었다.
다음 날 오전 5시, 여행의 끝을 알리는 알람 소리에 뒤척이자마자 가라앉은 서늘한 공기층에 직감적으로 알았다. 날이 흐리다는 것을, 곧 비가 올 거라는 걸 말이다. 그렇지만 형과 나는 어차피 비행기를 타러 가야 하니까 숙면하는 두 동갑내기를 뒤로한 채마저 윗몸을 일으켰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후줄근한 잠옷 차림 그대로 밖을 향했다. 대부분 ‘혹시나’는 ‘역시나’로 끝나곤 한다. 술 마신 다음 날 아침은 발개진 태양도 부끄러운지 빈틈없는 구름 뒤로 역시나 숨어있었다. 어느 정도 예상한 결말이었지만 우리는 마지막 일정이었기에 괜히 더 아쉬웠고, 그때 고개를 떨군 내 머리 위로 난데없는 소낙비가 떨어졌다. 뒤이어 굵직한 빗방울 감촉에 움찔거리다가 힘껏 고개를 든 순간이었다. 칙칙한 무채색들 사이 홀로 색을 띤 쌍무지개가 저 멀리 수평선 위로 경외한 존재감을 뽐냈다.
“와… 형! 저거 봐- 돌았다…”
양쪽 볼에 넉넉히 자리한 내 광대처럼 둥그런 보름달을 보면 소원이 먼저 생각나고, 뜨고 지는 태양에도 소원부터 비는 나는 이 순간을 운명이라 여기며 모아둔 소원들을 거듭 종알거렸다. 대체로 그렇겠지만 아무리 많은 소원을 빌어도 매번 크게 다르지는 않다.
“우리 가족 건강하게 해주세요.”
“행복하게 잘 지내게 해주세요.”
“로또 1등 아시죠? 연금복권도 좋고요.”
어제와 토씨 하나 변함없는 3종 세트. 그런데 쌍무지개가 처음이라 그랬던 걸까. 누군가의 활짝 핀 눈웃음을 닮은 다채한 곡선을 눈으로 따라 그리는 이 상황이 굉장히 특별하게 느껴졌다. 아니 그렇게 느끼고 싶었던 거 같다. 그래서 한 번도 빈 적 없던 나를 위한 특별한 소원을 빌어야 할 것 같았다. 근데 뭐든 해본 놈이 잘한다고. 그 순간 뱉어낸 특별함은 아무도 인정 못 할 평범함이었다.
“쌍무지개님. 저요. 이제 후회도 안 하고 싶고, 저를 위해 살아보고 싶어요. 저도 좀 행복해지게 해주세요. 누군가를 정말 사랑해 보고 싶어요.”
별의별 진심을 잔뜩 뭉쳐낸 이 소원은 누가 봐도 연애를 원하는 슈퍼싱글의 외침이었다. 그런 줄만 알았다. 광각 카메라에조차 가득 담을 수 없이 흘러간 시야를 모조리 삼켜버린 쌍무지개. 그 형태가 소멸할 때까지 10분가량 반복해서 빈 소원은 이것 또한 지나고서 하는 의미 부여일지도 모르지만, 어느 정도 생각지 못한 모습으로 이루어졌다. 완전하지 않은 것들이 그만의 조화를 갖추었을 때였다. ‘그냥 잠이나 더 잘걸.’ 눈앞 경탄을 놓칠세라 합장하기 직전까지도 어김없이 잿빛으로 하루를 메우던 소년은 어떻게 자신을 사랑하게 된 걸까. 사랑한다는 건 무엇일까. 내가 만나온 수많은 필연도 탓할 수 없는 선택의 연속이었고, 이전의 먹먹했던 감정변화와는 차원이 다른 결핍의 계절들이 휘몰아 파도를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