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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독 Oct 16. 2023

“아… 그럼… 저도 번호 찍어주세요!”

150일짜리 소원

   스물다섯의 여름이었나, 가을이었나. 환절기 바람결에 익숙함을 벗은 안정감에는 큼지막한 균열이 생겼고, 그사이 소원은 존재감을 드러내었다. 더군다나 그 준비를 마치기까지의 모든 움직임은 불과 150일 만에 이루어졌는데, 나는 이 움직임을 오래된 소원의 결정체라고 단단히 착각하고 말았다. 하루아침에 세상이 달라질 수는 없었지만, 하나의 우주가 변화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우리는 과정 위에 존재한다. 주저앉을지. 내디딜지, 아니면 잠깐 머무를지.     


   이름 예쁜 사람을 좋아한다. 나의 본명 ‘수민’이라는 이름은 주위에 한 명쯤은 있을법하게 평범했고, 서울로 올라와서는 여자 이름 같다는 말도 자주 들었다. 그래서일까? 아무 계정을 만들 때도 닉네임 정하는 데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리는 편이고, 외자 이름이나 특이한 이름을 발견하면 부러움에 새로 이름을 지어보고는 한다.

   이름에 호감을 느낀다고 말하면 찌푸려진 의심형 미간과 물음표 가득한 감탄사로 독특하다고 느끼는 게 대부분이다. 하지만 한 친구는 본인 재미를 위해 자신과 제일 두터운 동명이인 여자아이를 소개해 주는 새로운 반응을 택했다. 수민과 수민 조합이면 재밌겠다는 의견이다. 이런. 여자가 적어도 4배쯤은 많은 이름이라 동명이인과의 만남에 대해 상상해 본 적 없다면 뻔한 거짓말이지만, 실제로 눈앞에 나타나니 얼굴에는 멋쩍은 헛웃음만 흘렀다. 공교롭게도 어언간 열원하게 된 가수 이름도 나와 같다. 그것도 이 씨(?).

   실제로 본 동명이인의 첫인상은 ‘딱 이름값을 하는구나.’. 제주에서 그토록 소원을 빈 직후라 잘해보고픈 마음도 컸지만, 그러기에는 참지 못한 호기심으로 출동하는 마음이 너무 컸다. 하필 김치전에 막걸리를 애호하는 것까지 똑같아서 첫 만남에 “막걸리 무한 리필 콜?”. 한바탕하고 소개팅인 듯 친구 같은 애매함을 이어갔다. 우리는 찰나의 선택이 어떤 내일을 가져다줄지 알지 못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명이인의 느린 답장을 시작으로 대화는 점점 늘어졌고, 이건 의도치 않게 다음 우연으로 가는 연결고리가 되었다. 하릴없는 기다림에 스마트폰만 만지작대던 나는 어떠한 교류도 없이 SNS만 서로 팔로우하던 소원에게 문득 스토리 답장을 보냈다.     


   소원은 대외활동에서 만난 3살 차 동생의 입시학원 친구다. 내가 좋아하는 이름과 웃음을 머금었기에 자그마하게 스친 이미지에도 첫눈에 끌렸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동생에게 소개해달라고 졸랐었다. 다만 잠깐의 긴장도 느낄 새 없는 실패였다. 몇 달간 줄곧 나의 소개를 주선하려던 동생이었으나 어떠한 물음도 꺼내지 않았다. 소원의 사정이었고, 세세한 이유까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그리고 3개월쯤 지나서였나. 근래 가깝게 지내던 친구 잎새가 스마트폰을 내놓으라는 시늉을 하더니 혓바닥만 나불대고 아무런 움직임도 제시하지 않는 나를 대신해 소원의 비공개 SNS를 팔로우 눌렀다.

   “야! 설마 진짜 누른 거 아니지? …정-말 고맙다.”

   그로부터 2달이 될 무렵이었다. ‘요청 수락’ 다시금 반년이 지나 스토리 답장으로 이어진 첫 대화는 사진 이야기였다. 나는 영상 전공자라 카메라에 대해서는 나름 잘 알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장착하고는 최근 사진 계정을 만든 소원에게 질문 폭탄을 쏟아냈다. 물론 눈빛은 메시지에 안 보이지만 말이다.

   “카메라 뭐 쓰세요?”

   “무슨 렌즈 쓰세요?”

   “보정은요?”

   약간은 성가시게 느껴진대도 이상하지 않을 연속적인 질문에 빠르고 긴 답장을 주는 걸 보니 둘 중 하나였다. 소원도 내가 궁금하거나, 그냥 친절한 사람이거나. 나와 아무 맥락도 없는 사람과 나누는 대화가 처음이라서 얼마간 어리바리했지만, 처음치고는 나쁘지 않았던 거 같다. 사실 없던 명분이라도 만들어서 한번은 만나보고 싶었는데, 어쨌든 우리는 모르는 사이였고, 혹시라도 아는 동생에게 피해를 줄까 조심스러웠다.     

   이날로부터 우리는 정확히 2주 뒤, 2층 주택의 나지막한 심야 술집에서 처음 만났다. 소원이 다니는 학교는 우리 외삼촌 댁 바로 뒤편이었고, 때마침 인근에서 홀서빙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는 소식에 저번 대화에 이어 다시 한번 ‘옳다구나!’ 물음표를 기울였다.

   “요기 술집이에요? 저희 외삼촌 댁 근처네요 카카카”

   “아 정말요? 카카카 술 마시러 오세요!”

   “언제 언제 몇 시에 알바하세요?”

   “월수금 밤 8시 30분 이후로 쭉 있습니다!”

   “오호… 놀러 갈게요!”

   “넵! 근처 오게 되면 놀러 오세요!”

   그래. 용산구면 옆 동네지(우리 집에서는 45분. 외삼촌 댁은 마포구다). 알고 보니 외삼촌 댁 주변도 아니었고, 근처의 근처조차 갈 일이 없었지만 중요한 건 단지 월수금 밤 8시 30분이라는 정보였다.   

  

   제일 가까운 월요일. 급히 만날만한 중간지점이 대략 용산쯤 되는 경찰학교 동기 욱에게 오랜만에 보자며 능청스러운 약속을 잡았다. 오늘은 저 가게를 가야만 해. 오후 9시경, 일자로 탁 트인 복고풍 먹자골목을 요리조리 긴장으로 누비고는 약속 시간에 맞추어 욱이 나타날 때까지 대외활동에서 터득한 인사법을 복습했다. ‘ㅇ아…안녕하세요… ㅈ…저예요(?).’ 그렇게 두상을 조아릴 때마다 찰랑대는 비닐봉지 속 마찰음에 뻣뻣해진 몸집을 깨우고는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욱과 전부 내디딜 때까지 이완하는 심호흡을 반복했다. 그 후 소원이 있는 가게에 들어가서야 솔직하게 고백했다.

   “방금 알바생 봤어? 저 사람 보러 왔는데. 알아봤으려나…”

   흥미로 에워싸인 욱의 낯빛이 연달아 내게로 스몄다. 안 그래도 떨려서 돌아버리겠는데, 기대에 충족하지 못할까 하는 부담감마저 스멀스멀 달아올랐다. 그에 소원에게 주려고 사 온 꼬물이 젤리와 에너지 음료를 뒤적거려 책상 위에 올려두고는 한참을 망설였다.

   ‘언제 어떻게 말 걸지…?’

   인사는커녕 평소 길 묻기도 못 하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거북목을 계산대 각도로 꺾어내 여덟 걸음쯤 떨어진 소원의 동태를 살피는 것뿐이었고, 변명과 머뭇거림을 반복하다가 벽에 붙은 ‘물은 SELF’ 문구를 어찌 발견해냈다.

   “도대체 언제 가게?” 식어가는 눈망울을 짓고는 욱이 속삭였다.

   “진짜 지금 물 뜨러 가면서 말 걸게.”

   얼떨결에 엉덩이를 떼었고, 정수기 레버를 당기는 도중이었다.

   ‘그래. 물만 다 뜨고 말 걸어야지.’

   그렇게 떨림을 합리화하는데, 소원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혹시 이수민 씨 아니세요?”

   “네? 맞는데…”

   “왜 말 안 거셨어요?”

   “아, 물만 뜨고…”

   아니 분명 내가 먼저 말 걸려고 했는데. 아쉽게 됐다(?). 자리로 돌아온 나는 주전부리 선물을 핑계 삼아 다시 소원에게 다가갔고, 서비스 사이다와 더불어 돌아와서는 김빠진 자리를 마저 이어갔다. 그래, 내가 그렇지 뭐. 기웃만 거리다가 추가로 한 시간이 흘렀다.     


   “욱아. 만약 계산대에 사장님께서 계시면 네가 계산! 소원이 있으면 내가 계산하는 거야. 알겠지?”

   다시는 못 오겠고, 나갈 때는 꼭 번호를 받아야 한다. 실은 이 정도로 천지개벽적인 계획까지는 없었는데, 안부나 물으러 온 거냐는 어질은 욱의 질의에 급조하였다. 어질어질 어지른 머릿속에는 온통 번호 생각뿐이었고, 작정하고 나간 계산대에는 소원이 서 있었다. 그러나 계산서에 0이 더 찍혀도 모를 긴장감에 역시나 굳어버렸다. 후유. 또 자책이라니. 그때 다시 한번 소원이 말을 걸었다.

   “적립하시겠어요?”

   “네?”

   소원이 포스기를 가리켰다. “여기 전화번호 찍어주세요.”

   이때였다. 다가온 우연의 실체는 내디뎌야만 알 수 있었다.

   “아… 그럼… 저도 번호 찍어주세요!”

   생소한 모양을 뱉어낸 까슬한 입술과 앞 부근을 아른거리는 새까만 눈동자. 그곳에 비친 설면한 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스마트폰을 들이밀었다. 뭐 받긴 받았으니… 성공이랄까. 잃어버릴까 봐 받자마자 캡처도 눌렀다. 고마워, 말 걸어 줘서. 먼저 물어봐 줘서(?).     


   그날 소원과 나의 어색하고 낭랑했던 주고받음은 밤새도록 오갔다. 유달리 닮아있던 우리는 서로의 우연이 맞닿아 딱딱 들어맞는 날들에 감사하며, 대학로, 신촌, 뚝섬유원지, 북악스카이웨이. 그 주에만 4번을 만났고, 2019년 남은 시간 대부분을 함께 채워갔다. ‘안정’이라는 말에 끌리는 이유. ‘후회’가 일상인 이유. 나의 계획은 불안이 만든 충동이었다. 어디에선가 떠밀려진 선택들은 두려움이었을까. 곡진했던 소원의 결단이었을까. 이때만 해도 이전과 같은, 아니 그 감정이 몇 배는 증폭된 12월을 만날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다음은 숨죽인 소원으로부터 5년 전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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